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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부여된 태초의 능력에 대해

인간에게 부여된 태초의 능력에 대해                        

언제인가 신은, 비록 자신의 형상을 닮긴 하였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새로운 하나의 개체들을 이 세상에 내어 놓았고 그날 이후부터 그 개체는 이 행성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처음부터 자신들만을 위해 예비된 것인 양 누리면서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다. 적당한 육체적 능력과 적당한 정신적 능력을 부여 받은 그 개체는 신의 손과 호흡으로 탄생했던 그 이전의 다른 어떤 개체들보다는 괜찮아 보였고 그 결과에 대해서 신 또한 아주 만족했던 것 같다. 


하긴 그 일이 태초의 케이아스를 힘겹게 정리한 후에 있었던 것이었고, 그 일로 인해 신은 비로써 ‘창조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신의 입장에서도 자기 스스로를 정말 대견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훗날에 누군가의 손을 빌어 그때 신이 받았던 감흥을 짧게나마 기록에 남겨 두었다.  


“보기에 좋았다.”(물론 이 표현은 신의 손을 통해 창조된 모든 것들(세상 만물)이 제 자리를 잡아 ‘스스로가 스스로에 의해 그러하게 된’ 가장 자연스럽게 상태에 놓인 상황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 개체는 지금 이 행성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라는 인간의 직계 선조이다. 고고학과 인류학에서는 현존하고 있는 우리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 S. Sapiens)>라고 명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때 신이 빚어낸 인간이라는 개체는 바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진정으로 고귀하고 신성한 능력’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될 운명을 머금고 호흡을 시작한, 결국에는 지금의 우리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 α ――――――     


적당한 능력을 부여받았던 인간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에게 허락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탐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태초부터 욕심을 통제할 수 없는 지극히 탐욕스러운 존재였던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인간의 욕심이 후천적으로 발생한 것인지, 태초부터 내재된 것인지는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하지만 결국에는 욕심은, 신의 어떤 의도에 의해 인간에게 심겨진 것이거나(이 경우 그 의도에는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해석과 추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뫼비우스의 띠를 돌 듯 가없이 늘어지기 마련이다.), 신의 실수에 의해 것(신이 무결하다는 주장을 믿는 이들에게 이 경우는 배제될 것이다.)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욕심'은, 어느 한 순간 방아쇠를 당겨 격발하는 것과 같이, 어떤 특정한 시점을 그것의 기원이라고 몰아가기 어려운 현상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육체마저 지배하게 되는 정신적인 작용이다. 


어쨌든 욕심은 물질적으로 더 큰 풍요를 갈구하게 만들었고 정신의 욕심은 인간을 ‘의문’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게 만들었다. ‘의문’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숙명>이면서 현실에서의 삶을 아슬아슬하지만 고귀하게 만들어 주고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의문은 그 작용에 따라서는 긍정적인 것이 될 수도 부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는 양면적인 정신의 형상이다. 의문의 이러한 양면성은 그것이 ‘욕심’에서 발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문은 그 발원지는 하나이지만 그 작용은 달라지는 것이다.  


태초에 인간에게 주어진 ‘적당한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단지 그럭저럭 먹고살면서 크게 불평 없이 살아가다가 이 지구라는 행성의 지상을 떠나는 것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 그 정도란 것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인간의 삶을 살펴보면, “창조주인 신조차 미처 정해 놓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인간의 욕심이 태초부터 그 한계란 것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라면, 내 안에서 가없이 커져만 가고 있는 욕심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 α ――――――     


우리라는 인간은 태초부터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고귀한 능력’을 부여받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다. 따라서 ‘신의 그때’와 ‘인간의 그때’를 우리는 사유를 통해 돌이켜 볼 수 있다. 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게 되면, 그때에 우리에게 부여되었던 적당한 능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실마리를 더듬을 수 있게 된다. 

“신이 창조주로써 인간에게 부여했던 적당한 능력이란, 자신을 창조주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을 신으로 따르고 섬길 수 있을 정도의 제한적인,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능력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신은 아주 이기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정신적인 능력 덕분이다. 이기적이라는 것 또한 정신적인 능력의 하나이며 인간의 이기심은 자신을 창조한 신을 닮은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아비와 어미의 특성을 자녀가 닮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어쨌거나 인간에게 태초에 주어진 육체적인 능력은 신이 의도한 바대로 아주 적당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신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태초에 신이 의도했던 적당함을 넘어선 ‘초과된 적당함’이 인간에게 주입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도 신의 능력에 비한다면 비교라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적 능력은, 비록 초과된 능력을 부여받긴 하였지만 결국에는 한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과된 정신의 작용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게 만들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욕심을 부리는 잘못을 반복하며 끝없이 저지르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된다. 만약 인간이 조금 더 완벽한 존재로 만들었어졌더라면, 인간의 능력이 좀 더 신의 능력에 가깝게 만들어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신을 좀 더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되고, 그러기에 신을 신으로서 좀 더 제대로 섬기고, 따르고 있지 않을까.  


태초 신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건, 우리가 신의 의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건, 또는 그 의도를 벗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건, 인간에게 있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란 태초부터 주어진 본능이고, 그것의 양이나 질의 정도를 제한할 수 없으며, 그래서 때때로 탐욕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인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진정으로 인간다울 수 있게 해주는 가장 고귀한 도구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뉴욕에서, 고일석(Dr. Franz 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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