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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증후군 -2

반 고흐 증후군 -2



심리적 압박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탈출구 자해

고흐의 풀 네임은 [빈센트 빌름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이다. 그의 중에서 [고흐]는 혈족의 이름(Family Name, 성姓)이고 [빈센트 빌름 반]이 고흐에게 주어진 이름(Given Name)이다. 부모가 그에게 붙인 이름에서 [빈센트 빌름]는 원래 그의 형에게 붙여졌던 이름이었다. 고흐의 형인 [빈센트 빌름 고흐](Vincent Willem Gogh)는 고흐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852년 태어났지만 곧바로 죽었고 다음 해인 1853년에 고흐가 태어났다.


고흐의 부모는 첫째 아들이었던 죽은 빈센트에게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부모는 둘째인 고흐에게 죽은 형의 이름을 붙였다. 고흐는 둘째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첫째이자 장남이 되었고 죽은 형의 이름인 [빈센트 빌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갖게 된 것이다.

고흐의 부모는 고흐가 형을 대신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은 고흐를 형처럼 대하였을 것이고 고흐는 자기 자신으로서가 아닌 죽은 형으로서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이 고흐의 자존감을 크게 낮추었을 것이고, 고흐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으면서 결국에는 정신적 상처의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누구나가 ‘고흐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고흐가 살아간 19세기에는 갓난아이가 사망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고 죽은 형의 이름을 동생이 물려받는 일 또한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고흐가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해서 이러쿵저러쿵 입방아 찍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남’들과 천재화가 고흐를 비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천재는 천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재로 태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인간일 뿐 신이 될 수는 없기에 천재성은 다른 면의 부족함을 담보로 발현되는 것일 수 있다. 고흐의 ‘인간적인 부족함’이 전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고흐의 기질이 그러했기에, 고흐는 그렇게 태어났기에, 적어도 어느 정도의 역할은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사회를 떠나서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또한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이면서 가장 근본이 되는 단위이다. 사회를 인간의 몸으로 본다면 가정은 그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인 셈이다. 사람은 가정을 통해 사회화를 익히면서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가정이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가정은 부모에 의해, 특히 아버지에 의해 구성되고 통제되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보며 자라게 되고 부모로부터 사회적 역할을 익혀나가게 된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 겪은 일들이 성인이 된 후에 살아가는 근간을 이루게 된다.


사람의 삶에서 가정은 이렇듯 소중하지만 한편으로 가정은 가장 불안정한 사회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사회화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로 인해 자신은 가치 없는 사람이며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심리적 상처를 입게 된다.


어린 시절에 입은 그런 류의 상처는 성인이 되어서 고립과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정서적인 불안감으로 이어지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처한 외로움과 슬픔, 정신적 고통을 타인에게 알리거나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해를 선택한다. 그들은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자해와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신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한계상황에 처해있음을 표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을 배신한, 또는 배신했다고 자신이 믿는 사람에 대해 공격하기도 한다. 결국 정서적 상처에서 비롯된 사회적 고립과 낮은 자존감, 정서적 불안감이 자해와 같은 행동을 통해 자신만의 탈출구를 찾아 나서게 되는 것이다.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오른 사람들

극한의 슬픔 속에서 자기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이나 무기력해지고, 극한의 행복감 속에서 너무 과도하게 의욕적이 되는, 마치 ‘감정의 롤러코스트에 탄 것’ 같은 상황을 비정상적으로 반복하는 이들이 있다. 감정의 변화가 이와 같이 드라마틱하게 오르내리는 것은 누구나가 간혹은 겪게 되는 현상이지만 그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정신적인 질환을 의심해 봐야 한다.


극심한 슬픔과 무기력감에 빠질 때면 바닥까지 낮아진 자존감에 비참한 기분이 들게 되고 자해나 자살에 대한 충동을 느끼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극한의 행복감을 느낄 때면 기분이 과도하게 들뜨고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며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울증과 조증의 상태를 오르내리다가 보면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사회와의 건강한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워진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그 주기 또한 짧아지게 되면 결국에는 사회적인 고립을 맞이하게 된다.


그 상태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가 인정을 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이 인지하든 그렇지 못하든, 정체성의 혼동 속에서 현실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감정의 기복이 비정상적으로 심한 사람들에게서 목격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이중적이다, 양면적이다, 야누스적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한 그런 상태에서는 때때로 공격적이라서 폭력성을 띠거나 충동적으로 무엇인가를 저지르는(과도한 소비를 포함한) 경향이 목격된다.


하지만 조증 상태에서는 모든 일에 감사하고 행복해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에 매달리는 아주 능동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그 사람의 주변은 물론 가족들까지도 그런 모습을 ‘바로 그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교육 수준이 높고 자존감이 아주 높은 사람의 경우에는 조증상태 중에서도 어느 정도 절제된 조증상태만을 주로 자신의 주변에게 노출시키려 하며, 울증상태를 혼자만이 감당하려는 경향이 있어 결국에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러서야 “그 사람이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을 주변이 인지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조증 상태에서 생각하고 행하는 것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울타리이자 방패이기도 하지만 다시 울증 상태로 돌아왔을 때는 더 큰 우울감에 빠지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밝은 빛이 어두운 그늘을 만드는 것처럼 긍정적인 것에는 부정적인 것이 따르기 마련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자신감과 자기애(自己愛)로 인해 타인을 무시하게 되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울증 상태일 때는 자신의 미래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해 늘 걱정을 앞세우게 되어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상태가 되며 심한 경우 지독한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자신이 그동안 이루어온 것들과 해왔던 것들, 하고 있는 것들과 해야 할 것들에 싫증이 생기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생각에 무작정 회피하려하게 된다. 그 정도가 심해지다 보면 세상이 나를 싫어한다는, 사람들이 나를 피한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히게도 된다.


by Dr. Franz KO(고일석), 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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