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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단편소설, 어느 개의 고백: 제목에 대해

<어느 개의 고백>이라는 제목에 대해

적어도 나에게는 ⟪어느 개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기억되고 있는 카프카의 이 미완성 작품은 일반적으로는 ⟪어느 개의 연구⟫(독일어 원문에서는 Forschung eines Hundes)란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독일어 사전을 보면 Forschung(발음기호로는 [│fɔr∫ʊŋ])이란 단어가 ‘연구, 탐구, 조사, 답사, 탐험’의 의미를 갖고 있으니 ‘어느 개의 고백’보다는 ‘어느 개의 연구’라고 번역하는 것에 더욱 힘이 실릴 수도 있다.

게다가 1933년에 영국 런던의 Martin Secker에서 출간된 윌라(Willa)와 에드윈 무어(Edwin Muir)의 최초의 영문판 제목이 <Investigations of a Dog>이라는 점도 <어느 개의 연구>라고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카프카의 삶과 문학 그리고 사상에 대한 이해를 가진 상태에서 이 작품을 다시 읽게 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인 ‘개 철학자’의 “개 종족은 무엇을 먹고 살아가며, 먹을 것은 어디에서 생기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조사(연구, investigation) 및 이에 대한 보고가 이 단편의 내용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어느 개 철학자가 자신들의 족속에 대해 '조사' 또는 ‘연구’를 한 것이긴 하지만 좀 더 그 속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되면 그 조사란 것이 ‘섬세한 살펴보기와 세밀한 탐구를 통해 자신를 포함한 자기 족속에 대한 주관적인 고백’과도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는 <어느 개의 연구>라든지 <어느 개의 조사>와 같이 민민하기 짝이 없는 제목보다는 <어느 개의 고백>이라는 ‘뭔가가 있을 것만 같은’ 제목이 좀 더 자연스럽고 문학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제법 길게 해 본 이라면, 혹시라도 생겨날 수 있는 시시비비를 피하기 위해서는 원문 자체의 문맥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과 최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관점을 배제해야만 한다는 것을 온 몸이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그러니 <어느 개의 연구>라든지 <어느 개의 탐구> 또는 <어느 개의 조사>라고 번역하는 것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면서도 무난한 방법인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카프카의 작품 <Forschung eines Hundes>에 대한 번역을 <어느 개의 연구>로 받아들이든 <어느 개의 고백>으로 받아들이든, 그것은 전적으로 글을 읽는 이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외국어로 쓰인 문학작품의 번역에 있어 ‘문학적으로 완벽하면서도 완전히 객관적인 번역’이라는 것은 인간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들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의역’(意譯)이라는 단어가 국어사전에 버젓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표준국어사전에 따르면 의역이란 ‘원문의 단어나 구절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살리어 번역함. 또는 그런 번역’을 말하는 것이다).


그 언어를 알고 있으며 그 언어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그 언어로 쓰인 문학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완전하게 별개의 일이다.

문학작품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번역하는 이가 철저하게 문학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 작품을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이 속하고 있는 장르와 그 작가의 삶과 사상을 제대로 알아야하고, 거기에 그 작가의 태어남과 죽음, 사랑과 이별, 아픔과 기쁨 심지어 교육과 친구관계를 함께 나눌 수 있어야만 한다.


외국어로 쓰인 작품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으로 인해 비록 동일한 작품이라 하더라도 대중적인 번역가의 번역물과 대학교수의 번역물에서는 생각보다 큰 간격이 찾아진다.

그것은 대학교수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원문에 충실하려는 경향이 있고 대중적인 번역가는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 번역하려는 경향으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중에는 그 작품에 대한 문학적인 이해의 깊이가 깊으면서도 문학적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번역한 작품에서는 높은 문학적 완성도까지 함께 만나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원문에 충실하려고 한들 단어 자체의 선택, 단어와 단어가 연결되면서 주는 느낌, 그것들이 문장으로 연결되면서 담고 있는 작가의 감정과 사상이 새겨져 있는 예민한 표현들을 완전하게 번역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한 언어가 다른 작품을 번역하는 일이기에 번역된 텍스트 안에는 번역하는 이의 사상과 학문적 배경, 그리고 문학적 배경이 의도적으로 또는 은연중에 새겨져 담기게 된다는 점 또한 번역 작품을 읽을 때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작품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독자라면, 그 작품을 쓴 작가의 생애와 그가 쓴 다른 작품들, 그리고 작품이 집필된 당대의 사회 및 문화적 배경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앞서 있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이해가 없이 작품을 읽게 되다면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서 언제가 다시 그 작품을 읽는 것을 권하고 싶다.


사람의 삶은 그리 길지 않으며 평생 동안 자신의 손이 잡게 되는 ‘진정한 명작’은 안타깝게도 많지 않다.

어쩌면 겨우 몇 권만이 마지막 순간에 서재를 꽂혀 있을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진정한 명작이란 몇 번을 읽는다 해도 결코 지겨울 일이 없으며, 읽을수록 ‘정신의 도끼’가 남기는 상처와 같이 자신의 삶에 ‘위대한 흔적’을 남기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진정한 명작이란 궁극적으로는 ‘읽는 것’이라는 책으로서의 기능적인 면을 넘어 한 사람의 ‘삶을 장식’하게 됨으로서 책으로서의 본질 자체까지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행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카프카의 작품 <어느 개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고, 이 작품과 이미 오래전에 얼굴을 텄다는 것이다.


by Dr. Franz KO(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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