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작은 문학
그 즈음에 들어 카프카의 생각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그때 즈음에 더욱 불타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괴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일기장에 옮긴 바로 그 다음 날인 1911년 12월 26일에 카프카는 카프카 식의 문학 형태를 구상하게 된다. 그것에는 그 즈음에 관람하던 이디시어를 사용하는 유랑 극단의 공연을 보면서 받았던 문학적인 자극으로 인한 것도 녹아들어 있다.
카프카는 작은 부분 각각이 다른 부분들과 접속하고, 작은 부분들의 부딪침을 통해 전체가 이루어져서, 결국에는 용광로와 같이 들끓어 오르는 하나의 작품이 되는 카프카식의 문학을 구상하게 된다. 이러한 문학 형태가 작은 문학이다.
카프카는 같은 날인 1911년 12워 26일의 일기에서 큰 문학과 작은 주제를 다루는 문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작은 주제들을 문학적으로 다룰 때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때 작은 주제들이 다루게 되는 범위는 약간의 열정이면 충분할 정도라야 하며, 작은 주제들 각각은 저마다의 논쟁적인 전망이나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큰 문학에서는 주제의 큰 흐름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 그것을 건물로 비유하자면 ‘있기는 하지만 지하실과 같이 신경을 두고 찾아보지 않는다면 있는지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작은 주제들을 다루는 문학에서는 조명을 받는 사건이 된다. 또한 큰 문학에서는 사람들을 잠시 끌어 모으는 정도의 것에 불과한 사건이 작은 주제를 다루는 문학에서는 사람들 전체의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이 되기도 한다.
(1911년 12월 26일 카프카의 일기 중에서)
이 번역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작은 의역이 일부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무엇을 큰 문학이라고 한 것일까. 여기에 대해 카프카 연구자들은 ‘독일 문학’과 ‘유대 문학’, ‘체코 문학’과 같이 당시 사회적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이들의 문학을 큰 문학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카프카가 이즈음에 쓴 일기를 보게 되면 ‘사회적 다수의 문학이 큰 문학’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앞에서 말한 ‘작은 문학’과의 접속점을 찾아볼 수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작은 부분들이 서로에게 연결되어 들끓어 오르면서 전체가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것이 카프카의 작은 문학이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작품을 이루는 구조와 작품의 내용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12월 26일의 일기에서 말하고 있는 ‘작은 주제’, ‘약간의 열정이면 충분할 정도의 주제’, ‘큰 흐름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현상’과도 같은 표현을 보게 되면 카프카의 작은 문학은 범위와 주제, 내용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이런 점들을 통합적으로 고려한다면 카프카가 말한 작은 문학을 어떤 하나의 문맥으로만 정의하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이가 코끼리의 코를 만지고서는 그것이 코끼리의 전체 형상이라고 온 몸으로 강하게 주장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지르기 십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그와 같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자면 카프카의 작은 문학은 하나의 부분이 다른 부분과 내용과 구조가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며 이질성을 가진 하나의 새로운 작품을 생성해 내는 문학의 형태라는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카프카의 소품과 단편, 우화와 일기와 같은 작은 글들이 엮여서 하나의 작품집으로 출간됨으로서, 카프카의 문학이라는 새로운 큰 문학이 들끓어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 충분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사회적으로는 카프카가 살아가던 당시 프라하에는 피지배자인 체코인의 문학과 지배자인 독일인의 문학, 피지배자의 피지배자인 유대인의 문학이 문학적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내용상의 문제를 떠난다면 그것들은 당시 출판 시장의 경제적 규모, 독자의 수적 규모, 작품의 양적 규모, 작가의 숫적 규모와 같은 규모의 차이만이 있을뿐이지 그것들만의 ‘사회적⋅문학적 영토’를 확보하고 있는 다수의 문학이자 큰 문학이었다. 이러한 분류를 어떻게 보든 간에 적어도 카프카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당시 프라하에서 큰 문학을 이루고 있었던 그들 세 개의 주류 문학은 지금의 문학과는 입장과 흐름이 달랐다. 그것은 당시의 문학에는 정치적⋅사회적 문제가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학 영토에는 민족성과 민족정신이라는 나무들이 도처에 심겨져 있었다.
프라하가 비록 체코의 수도이긴 하지만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당시 체코의 문학은 수적 다수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소수로 살아가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민족성과 민족정신을 화두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독일인의 문학의 경우에는, 비록 당시 독일인이 정치⋅사회적으로는 지배 계층을 형상하고 있었지만 프라하라는 제국의 변방에서 수적 소수인 입장이었기에 그들 나름대로의 민족성과 민족정신을 화두로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대인의 문학은 독일인의 문학이나 체코인의 문학보다 민족성과 민족정신을 부각시키려는 정도가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시 유대인이 수적 정치적으로 소수자였기에 사회적으로 취약한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두 민족들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것이 유대인의 생존 방식이었고 그로 인해 유대인이 지금과 같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