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카프카와 들뢰즈: 소수적인 문학을 위해서

카프카와 들뢰즈: 소수적인 문학을 위해서


철학자 질 들뢰즈가 카프카의 문학을 자주 소환한 것에는 그 자신의 정치철학이 관련되어 있다. 

정치에 대한 들뢰즈의 철학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정치: 미시(微示)파시즘과 소수(少數)되기]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표현한 들뢰즈는 카프카의 작품에서 ‘아나키스트적인 요소’와 ‘사회주의자적인 요소’를 찾아냄으로서, 파시즘에 격렬하게 대항하는 무정부주의자이며 또한 사회적인 억압에 강하게 저항하는 사회주의자이자 반정부주의자인 카프카를 만나게 되었다. 

따라서 들뢰즈는 카프카를 아나키스트라고 밖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들뢰즈는 자신의 연구와 작업이 기본적으로는 ‘민중 계층의 자기 해방’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진작부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들뢰즈는 그의 철학적 콤비이자 공산주의 활동가로 활동했던 펠릭스 가타리를 만나면서부터는 그런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들뢰즈는 현실정치에 있어서는 그런 것들과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정확한 것은 오직 들뢰즈 자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들뢰즈는, 스스로가 밝힌 것과 같이, 마르크스주의자적인 사상을 가진 것은 분명 하지만 그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사상적⋅철학적 차원에서의 주제일 뿐이라고 여겨질 만큼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프란츠 카프카가 사회 활동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비교적 관심을 덜 가졌다.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두 철학자의 관계에서는, 사회 활동에 있어서는 소극적이었던 아나키스트 프란츠 카프카와, 적극적인 사회 활동가였던 시오니스트 막스 브로트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게 된다.   

  

‘들뢰즈가 바로 현대철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들뢰즈는 현대철학을 대표하는 저명한 철학자이다. 

따라서 정치철학에 있어서의 그의 업적은 그가 이룩한 다른 뛰어난 업적들에 의해 가려지거나 과소평가되어, 큰 주목을 받을만한 주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들뢰즈가 카프카를 논한 것에 있어서는 그의 정치철학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카프카를 바라보는 들뢰즈의 입장은 그의 정치철학을 이해할 수 있어야만 ‘문학적인 철학’이자 ‘철학적인 문학’이라는 영토로 들어설 수 있게 된다. 


[들뢰즈-마르크스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할 만큼 들뢰즈의 철학과 마르크시즘을 연결하려는 다양한 연구가 여러 학자들에 의해 꾸준하게 이어져 오고 있지만, 막상 들뢰즈 자신은, 다른 분야에 비해서는, 그것에 대해 많은 문장을 남기지 않았기에 막상 그것의 실체에 대해서는 들뢰즈의 확실한 견해를 밝히기는 어렵다. 

하지만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Kafka: Toward a Minor Literature, 1975)와 <천 개의 고원>(A Thousand Plateaus, 1987)과 같이 펠릭스 가타리와 공동으로 저술한 저서를 통해 들뢰즈가 가진 정치 철학을 좀 더 선명하게 그려볼 수 있다. 


들뢰즈가 파악한 자본주의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본주의라는 사회 시스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에 있다. 

즉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비록 그것의 사회적인 변이로 인해 생겨난 부대적인 것일 뿐이며 결코 체제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오류에서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대안이 없는 채로 자본주의 하나만을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시스템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인간 사회는 혼동 속에 빠져 들게 될 우려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문학에서 마주하게 되는 ‘법‘과 ’아버지‘가 들뢰즈의 정치철학에서 파시즘화 되어버린 자본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인 들뢰즈는 아나키스트인 카프카의 작품에서 소수자의 문학(또는 소수 문학, 소수의 문학, minor literature)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카프카가 체코의 프라하에서 살았던 독일계 유태인으로 독일어로 일을 하였고 독일어로 글을 썼지만, 당시 주류 계층의 독일인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 ‘소수자적 정체성’을 지닌 작가라는 점에서 일부분이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소수’란 숫자적인 많고 적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힘의 문제에 있어서의 소수를 말하는 사회적인 용어이다. 

비록 수적으로는 많을지라도 사회적인 힘을 생성하지 못한 비주류 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소수’가 되는 것이고, 수적으로는 적다고 해도 사회적인 힘을 가진 주류 계층에 속하는 사람은 ‘다수’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수란 ‘사회적 소수’를 말하는 것이고 다수한 ‘사회적 다수’를 말하는 사회적인 용어인 것이다.  


들뢰즈와 카프카를 연결시킴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문맥은 ‘소수자’라는 것의 개념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카프카: 소수'라는 개념은 '들뢰즈의 소수'라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들뢰즈의 소수는 사회적인 소수이면서 또한 정치적인 소수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표현한 용어이다.

개념적으로 들뢰즈의 소수에는 카프카의 소수보다 더 많고 복잡한 것들이 엉켜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