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카프카: 소수’라는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위해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소수’(Minor) 또는 ‘소수자’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회학자들은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를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와는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사회 시스템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만 보게 되면 자본주의와 전제주의는 하등의 공통점을 가지지 않은 전혀 다른 두 개의 체제라고 할 수 있으며 들뢰즈 또한 이것에 대해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자본주의를 전제주의 중에 한 가지인 파시즘(fascism)에 빗대어 비판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들뢰즈가 파악한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본주의의 파시즘화’와 이에 따른 ‘소수에 대한 극한적인 소외’에 있다. 따라서 들뢰즈가 말하는 소수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을 제공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전체주의, 파시즘의 개념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이해가 요구된다.
• 전체주의: 전체주의는 개인의 모든 활동은 민족과 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이념을 기반으로, 전체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개개인의 자유로운 활동뿐만이 아니라 사고 및 사고방식 또한 통제하고 속박, 억압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라면 독재체제조차 얼마든지 허용된다는 사상 및 사회 경제 체제이다. 전체주의는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과 같이, 한 사람에 의한 또는 하나의 당에 의한 독재체제를 위한 직간접적인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으며 지금도 또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 자본주의: 자본주의는 생산 수단을 자본으로서 소유한 자본가가, 이윤의 획득을 위하여 자유로운 생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상 및 사회 경제 체제이다.
• 파시즘: 파시즘은 제일 차 세계 대전 후에 나타난 극단적인 전체주의의 한 형태로서, 배외적인 정치 이념 및 그 이념을 따르는 지배 체제를 말한다. 파시즘은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전체를 위해서는 일당 독재와 폭력적인 방법에 의한 지배를 허용하며, 지배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한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철저한 국수주의ㆍ군국주의를 지향하여 민족 지상주의나 반공과 같은 정치적인 수단을 전면에 내세워 타민족이나 타국에 대한 침략 정책 또한 정당화한다.
들뢰즈는 전체주의를 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려는 코드화의 성격을 가진 체제(시스템)로 보았으며, 자본주의는 이것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욕망을 표출시키는 탈코드화의 성격을 가진 시스템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자본주의는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사회 시스템이며, 또한 자본주의는 자유주의를 향한 인간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이성적인 사회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사회 시스템은 경제 시스템을 포함한 개념, 즉 사회⋅경제 시스템이다. 하지만 몇 걸음 더 자본주의를 향해 다가서게 되면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문제의 다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개개인의 ‘탈주에 대한 욕망’과 ‘완전한 자유를 향한 욕망’을 보장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의 사회적 실현 가능성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그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그 실행 과정에서 일으킨 부작용(副作用, side effect)으로 인해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와도 같은 방식으로 동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탈주와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상품성과 소비에 의해 재코드화 되어 결국에는 사회 시스템에 일원화됨으로서 그 발현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부작용을 발생하게 된다. 일원화된다는 것은 곧 하나의 체제를 이룬다는 것이기에 자본주의는, 일원화라는 ‘행위적 속성’으로 인해 전체주의로 흐르게 될 가능성을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일원화라는 부작용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에 있다.
들뢰즈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탈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일원화시켜, 다른 형태로 재코드화 될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이다. 따라서 들뢰즈는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라고 본 것이다.
들뢰즈는 이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의한, 시스템 자체에 대한 재코드화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소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소수란, 숫자적으로 주류를 이루지 못한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거나, 여성과 동성애자와 같이 ‘사회통념상의 약자’ 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소수란 그 사회에서 스스로의 코드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영역이 자신의 영토인 사람들을 일컫는다. 즉, 그 사회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그 사회에서 스스로를 코드화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사회적인 주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 바로 ‘들뢰즈의 소수’인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에 의해 자신을 코드화하지 못하고 사회 시스템에 의해 그 시스템 자체에 재코드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코드로의 재코드화를 할 수 없게 된다.
들뢰즈의 이 개념은 카프카의 ‘존재한다는 것은 그곳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속한다는 것’이라는 표현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래서 들뢰즈의 소수를 카프카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소수(Minor)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 어딘가에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에 의해 자신을 코드화하지 못해 사회적 다수의 영역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로서 그 사회의 주류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의 작품은 극한적인 파시즘과 독재체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버지인 헤르만 카프카와 ‘법’,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시스템’이 바로 카프카의 파시즘이자 독재체제이다. 카프카는 그런 파시즘이야말로 인간을 부조리한 상황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인간이 스스로에 의해 자신을 코드화하고, 재코드화를 통해 욕망을 실현하는 것을 막아서서, 결국에는 자신의 실존조차도 희미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악으로 본 것이다.
이와 같이 질 들뢰즈와 프란츠 카프카는, 한 사람은 철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문학 작가라는, 완전히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사람들로 보이지만 사실 그들의 사상과 표현에서는 상당한 유사점들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들뢰즈는 카프카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925년에 태어났다. 현실에서의 들뢰즈(1925-1995)가 세상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카프카(1883-1924)와 그의 작품들을 자신의 강연과 저작물에서 종종 소환해 내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