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카프카의 문학과 들뢰즈의 철학 사이에서는 상당한 부분에서 교집합을 형성하고 있는 공통적인 영역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어느 정도이냐’ 하는 것은 이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들의 철학과 문학을 접근하는 개인적인 방식에 따라 달라진다.
한 사람은 문학 작가라는 것과 한 사람은 철학자라는 점을 제외시키면, 카프카와 들뢰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문제’에 있다.
카프카는 문제를 던지기만 할 뿐 그것의 해결방법이나 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카프카가 던지는 문제는 ‘추상적화 된 문제’(abstracted question)이어서 그것의 틀과 형태만이 정해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독자는 ‘구체화 된 질문’(implemented question)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스스로가 그 답을 찾아 나서야만 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이것이 카프카의 문학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들뢰즈는 카프카와는 달리 자신이 던진 문제에 대해 ‘들뢰즈 식’의 풀잇법을 제시하였거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는 것이 이들 두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제시한 문제가 더욱 난해하게 보이는 것은 그가 철학자라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단순한 문제라고 하더라도, 물론 ‘절대적으로 단순하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단 철학자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철학적인, 그래서 난해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들뢰즈가 제시하고 있는 문제들은, 추상화를 통해 큰 틀을 제공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구체화 또한 상당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들뢰즈는 다수-소수의 문제에 있어서도 어떤 식으로 그것의 풀잇법을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해 몇몇 단서들을 내어놓았다. 이러한 들뢰즈의 단서들은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 이어지면서 ‘자율주의’ 또는 ‘들뢰즈-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의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들뢰즈가 제시한 해법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다라고 하기 보다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파시스트화 되어 가는 것을 선제적으로 경계함으로서 자본주의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들뢰즈 식의 마르크스주의’는 ‘교정된 자본주의’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카프카 또한 당시 유대인들을 들끓어 오르게 한 시오니즘과 민족주의에 대해 들뢰즈가 자본주의에 대해 취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하였다. 카프카는 시오니즘과 민족주의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그것들에게 발을 담그기는 했지만 너무 깊숙하게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카프카는, 자신이 의도한 것이건 그렇지 않건 것이건 간에, 후일에 이스라엘 민족의 연구자들이 그를 ‘시오니스트’ 또는 ‘민족주의자’로 해석할 수 있는 문을 어느 정도는 열어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