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은 어떤 표면에서도 깨어질 수 있고 부서질 수 있지만 여러 형태의 선들을 따라 탈주선을 끊임없이 재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는 개미떼를 근절할 수 없다. 그것은 개미떼는 대부분의 개미들이 파괴되더라도 끊임없이 개미를 재생하여 결국에는 다시 떼를 이루는 동물적인 리좀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의 단절은 탈영토화를 내포하는데 그 선은 다른 이탈선과 만나 재영토화를 이루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난초(오르키테, orchidée)는 말벌을 모사하여 유혹함으로서 말벌에게 자신을 꽃가루를 묻혀 ‘식물에서 동물’로 탈영토화를 이루며 또한 말벌의 생식 영역에서 재영토화를 이룬다. 오르키테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에는 모사, 모방, 의태와 같은 일종의 속임수가 관여되어 있지만 그것은 피상적으로 행해진 것일 뿐이며 그 본질은 ‘코드의 포획’를 통한 오르키테의 말벌화, 즉 ‘오르키테의 말벌 되기’(‘되기’는 프랑스어로는 devenir이며 영어로는 becoming이다)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되기’로서의 탈영토화가 다른 하나의 ‘되기’인 재영토화를 통해 이질적인 새로운 영토로의 영토화를 ‘보장’하며 이들 두 개의 ‘되기’가 서로 연결됨으로서 좀 더 강렬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순환을 발생시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건 모사나 흉내 내기가 아니라 ‘탈주선 안에서 이질적인 두 계열의 파열’이다. ‘파열과 진화’는 생물학적인 진화에서뿐만이 아니라 문명의 진화와 같은 비생물학적인 진화에서 무수히 발생하는 형상이다.
진화를 계보학적 관계로 보면 마치 수직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로부터의 파열(단절)을 통한 다른 것으로의 되기, 하나로부터의 탈영토화와 다른 하나로의 재영토화라는 리좀적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진화가 수직적으로 보이는 것은 시간이란 요소의 개입 때문이며 결국에 진화는 평행적이며 수평적인 리좀적 결연에 의한 진화인 것이다.
들뢰즈는 뿌리줄기, 땅 밑 줄기라고 할 수 있는 리좀(rhizome)을 그의 철학에 도입하여 ‘들뢰즈의 리좀’을 형성하였는데, 들뢰즈의 리좀은, 뿌리라는 하나의 중심과 위계적 구조를 제약적으로 가지고 있는 수목과는 달리, 내재적이고 유목적인 아무것에도 제약 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사유의 방식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리좀이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질들은 “어떤 것이 어떤 것과 접속하고 연결되는가.”와 같은 상호 간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게 되며 이때 그 관계의 정도에 따라서도 변화하게 된다.
“땅 밑의 줄기, 우발적인 것과 리좀을 제외한다면, 어떠한 것도 아름답지 않고 사랑스럽지 않으며, 또한 정치적이지 않다.”라는 들뢰즈의 표현은 리좀에 대한 그의 강한 애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1925년 1월 18일 생인 들뢰즈는 1995년 11월 4일, 스스로 호흡기를 뗀 후 자신의 아파트에서 창밖으로 몸을 던져 세상을 떠나감으로서 스스로 세상에서의 뿌리를 제거해 버렸다. 그는 ‘들뢰즈 = 들뢰즈의 철학’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지도 한 장을 그려 세상에 던져 놓았고, 그 지도는 리좀모델이 그러한 것처럼, 중심도 제약도 없이 다원화하면서 끊임없이 번식을 이루고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자유롭게 단절되고, 아무 곳에나 접속하고, 아무곳에서나 연결을 이루면면서, 시작이라든가 끝과 같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 갇히지 않는, 무한한 역동성과 가변성을 가진 사유의 아이콘으로 자라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