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나키스트의 유래나 문헌적인 의미를 상기시키려는 것이나 "아나키스트란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현상적인 사실을 주지시키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라는 작가의 삶과 사상의 파편들을 아나키스트적인 것에서 찾아보려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카프카의 삶과 족적에서 아나키즘의 흔적을 더듬어 보고, 이를 통해 카프카의 작품과 그의 내면을 좀 더 섬세하고 날카롭게 더듬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인 것이다.
아나키스트 카프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늘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카프카는 그랬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고독하고 외롭게 글을 쓰며, 글을 통해 구도의 길을 걸어 간 카프카는,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직접적으로는 표방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는 아나키스트적인 삶을 살았었다."
1913년 서른 무렵의 프란츠 카프카
남아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사진 중에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카프카는 검은 밤의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가장 카프카다운' 삶을 살았다. 카프카의 글을 제대로 읽어 온 독자라면 이미, 카프카는 글쓰기를 통해서 세상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 저항하였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른 나이에 병으로 죽으면서, 자신이 이 땅에 존재했었다는 물질적인 족적들과 정신적인 흔적들을 완전하게 지워버리기 위해, 마지막까지도 세상과 결코 화합하지 않기 위해, "내가 쓴 글들을 모두 불태워 달라."라고 그의 영혼의 친구인 막스 브로트(Max Brod, 1884-1968, Czech German-speaking Jewish)에게 부탁하였었다.
하긴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삶을 살았었으니, 세상에 반항하며 살았었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카프카는 결코 세상과 화합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카프카가 자신의 죽음을 세상에 배치시키는 방법이었고, 세상으로부터의 마지막 탈주였다.
그래서 카프카의 죽음을 '아나키스트 카프카의 세상에 대한 마지막 반항'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카프카의 부탁을 받은 막스 브로트는, 죽어가는 카프카의 앞에서는 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카프카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에게 남겨진 카프카의 글들을 태워버려야 할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이에 대해 막스 브로트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분명하게’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고 말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일에 와서 한 그의 말일 뿐이기에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어쨌거나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자신이 남긴 글들을 모두 태워달라는 카프카의 부탁을 막스 브로트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생전에는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보다 작가로서는 더 유명하였다.
카프카는 살아서는 무명작가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유명 작가의 반열에 오른 아주 특별한 작가이다.
생전에 작가 카프카의 작품을 탐닉한 열성 독자는 막스 브로트가 거의 유일했다고 할 수 있다.
막스 브로트는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프라하의 한 남자 프란츠의 영혼의 친구였으며 ‘글쓰기를 통해 구도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글쟁이 카프카의 문학적 조언자이자 열성 독자였다.
그는 카프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았기에, 카프카의 글 속에서 반짝이는 보석들을 발견하였기에, 카프카가 종이 위에 남겨 놓은 텍스트들을 불태워 없애는 대신에, 카프카의 사후에 작품집으로 편집하여 세상에 내놓았고 이를 통해 '작가 카프카'라는 ‘문학계의 위대한 별’을 탄생시키는 것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삶이라는 힘든 고개를 넘어서다 보면 어느 날엔가 문득 알게 된다. 어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을 때에 비로소 진실한 유효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지켜지지 않아야만 그 빛을 찬란하게 발하게 된다는 것을.”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지만 카프카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글들을 불태우지 않고, 분명 카프카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도, 막스 브로트에게 ‘그 잔인한 행위를’ 부탁의 문장에 실어 넘겨버렸다.
이 지켜지지 않은, 지켜질 수 없었던 부탁을 던짐으로서 카프카는 ‘자의적으로는 세상과 마지막까지 화합하지 않은 것’이 되었고,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들을 세상에 내어놓음으로서 ‘비자의적으로는 결국 세상과 화합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도 카프카는 생전에,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임을, 그렇게 되는 것이 운명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상과의 화합은 자의적이든 비자의적이든 "그것을 이루기만 하면 될 뿐이다."라는 문장을 입으로 글로 쏟아내는 이들이 있다.
이 문장이 일견으로는 무책임한 결과론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적당한 타협을 통해 세상과의 화합을 이루어가는, 자의적이면서도 비자의적이고, 연속적이면서도 비연속적인 정신과 육체의 행보의 집합이기에, 그들의 말을 굳이 탓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 하나 정도는 던져야 할 것 같다.
"카프카의 비자의적인 화합은, 그와 그의 작품들에 대해, 그것들 또한 세상과 비자의적으로 화합한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든 행위인 것일까. 그렇다면 카프카는 생전에,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까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문제의 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카프카 작품의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 저항과 불화합이 “카프카 당대에만이 아니라 지금에도 유효한 것일까."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한다.
"살아서 완전한 이방인의 삶을 살았었던 카프카는 그가 남긴 글들을 통해, 지금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저항의 날갯짓을 커다랗게 휘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뉴욕에서, Dr. Franz Ko(고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