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정적인 아나키스트 프란츠 카프카

정적인 아나키스트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를 추종하는 사람으로서 카프카를 아나키스트로 인정하고, 카프카의 아나키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지상에 존재했던 길지 않은 기간(1883. 7. 3 - 1924. 6. 3) 동안에 동유럽 보헤미아왕국의 중심 체코의 프라하에서 있었던 시대적 상황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를 숫자를 빌어 나타내면 ‘19세기의 끝 무렵을 지나가는 시기에서부터 20세기의 첫 무렵에 들어서는 시기’에 걸쳐져 있다. 1883년에 태어난 카프카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약 사십 년이라는 그의 일생 대부분을 보냈다. ‘때’라는 관점으로 보게 되면 카프카는 19세기가 끝을 향해 달려가며 ‘세기말적 현상이 지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혼돈의 20세기 초입을 살아가다가 떠나간 것이다. 


프라하는 카프카가 태어난 곳이자 성장한 곳이며, 폐결핵으로 1924년에 빈 교외의 [키어링 요양원]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밤마다 희미한 불빛에 기대어 삶과 세상에 대해 고뇌하며 글을 쓴 곳이다. 


프라하라는 도시는 지금에는 아름다운 관광지이지만 당시에는 상황이 달랐다. 당시 프라하가 동유럽의 중심 도시였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풍경은 유럽의 여느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프라하는 정치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독일인과 체코인 이외에도 카프카 일가와 같은 유대인들이 다양한 갈등을 만들어내면서도 나름의 조화를 이루어가며 지난 몇 백 년 동안을 살아온, 적어도 일반대중의 상당수는 그렇다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던, 유럽의 도시였다. 


일반대중은 ‘격변’이라든가 ‘갈등’과 같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는 단어에 대해 원초적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런 것들의 현실화는 언제나 일반대중의 희생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그런 것들이 발현되고 사방에서 그것들이 들끓어 오르게 되면, 일반대중은 부나비와도 같아서, 스스로가 타오르는 검붉은 불을 향해 뛰어들게 된다. 일반대중을 뜨겁게 현혹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이나 진실과는 상관없이 단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선동적으로’ 그들 눈앞에 펼쳐 보이기만 하면 된다.     

 

국가적으로는 제국주의가 확장되고 있던 세계적 상황에 맞물려 오스트리아 제국 또한 제국주의적 팽창을 꿈꾸고 있던 시기였다. 이에 교육은 군국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의무교육을 받아야만 했고 유럽 전역에서 발현한 민족주의는 여러 민족들이 뒤엉켜 살아가고 있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극심한 사회적 분열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심지어 같은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회주의자나 노동자 계층에서조차도 그들의 민족을 기반으로 여러 갈래로 분열되기 일쑤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민족주의는 포용력 없는 극히 배타적인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의 발로는 다른 민족을 향한 공격으로 종종 이어지기도 한다. 19세기와 20세기에 불어 닥친 유럽의 민족주의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 반셈족주의)라는 사회적 바람을 일으켜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그들을 사회적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유럽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반유대주의(반유태주의, 反猶太主義)

영어로는 anti-Semitism, 독일어로는 Antisemitismus인 반유대주의는 그 단어의 뜻처럼 [반셈족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명칭이 갖고 있는 원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오직 유대인들만을 향한 혐오와 차별, 증오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프라하의 경우에는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주된 민족이었던 체코인들과 독일인들이 그들 나름의 사회적 계층을 나누어 주류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기형적인 결합은 카프카를 [세계 1차 대전](1914.7.28 - 1918.11.11)이라는 참혹한 전쟁의 목격하는 유대인으로 만들었다.    


유대인의 표식을 가슴에 단 프란츠 카프카 (출처: WikiMedia Commons)     


세기말적 현상과 민족주의가 정치와 경제뿐만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을 휩쓸고 있는 혼돈의 시기에 프란츠 카프카가 태어나서 성장하였고, 밤의 어둠 속에서 고뇌하며 글을 썼다. 카프카가 살아온 시대적 상황은 그의 글 속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카프카의 글 속에 나타난 ‘체계화된 관료적 수직성’은 그가 살아가던 시대의 제국주의적인 경직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수직성이 들뢰즈가 말한 수목모델의 특성이 그대로 발현된 것인 반면에 카프카의 글을 그것으로부터 탈주하려는 리좀모델의 특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극단적인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는 당시 다양한 형태의 아나키스트를 키워내는 토양이 되었을 것이다. 필자 또한 만약 그 시대를 살아갔어야만 했다면,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진보적인 물음과, 자유를 향한 진보적인 의식을 가졌던 당시의 지식인들처럼, 아나키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민족주의와 세기말적 향상은 현대화로의 변이를 급속도로 가져왔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인간의 소외와 일반대중의 소수화 문제는 새로운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뿌리를 내리고 잎을 피워서 성장하게 하는 햇빛과 물과 양분이 되었다. 


당시 아나키즘이 유행한 것은, 많은 지식인들이 아니키스트가 된 것은, 우연히 아니라 그런 시대적 배경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 아나키스트들 중에는,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동적인 아나키스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정적인 아나키스트들이었다. 


//정적인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는 '아나키즘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통해 아나키즘을 실현하려는 이들을 동적인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아나키즘적인 의식을 가지고는 있지만 글쓰기와 몽상하기를 통해 '정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을 [정적인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카프카는 동적인 아나키스트가 아니라 [정적인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다.      


아나키스트 전체를 놓고 보면 동적인 아나키스트가 수적으로는 소수이겠지만 아나키즘을 이끄는 주류인 것이 분명하고, 이에 반해 정적인 아나키스트는 수적으로 아나키스트의 대다수이겠지만 아나키스즘에서는 비주류일 테니, 동적인 아나키스트가 아나키즘의 다수이고 정적인 아나키스트가 아나키즘의 소수인 것이다.


글을 쓰다 말고 잠시 창밖을 바라다본다. 나라면 어떻게 하였을 것인가. 만약 동적인 아나키스트가 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변명 같은 사유로 인해 그렇게 되지 못했다면, 고독한 몽상가나 외로운 사색자가 되어 글을 쓰며 사회시스템에 저항하는, 정적인 아나키스트가 되지 않았을까. 아나키스트가 되어서조차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가 되는 것이,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되는 것이, 그래서 사회적으로 소수의 소수가 되는 것이, 일반대중이란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일 수 있다.


뉴욕에서, Dr. Franz Ko(고일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