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를, 그의 작품만큼이나 ‘병적이고 난해한 작가’ 또는 ‘고독한 몽상가’라고 평가하는 국내외의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있다. 카프카의 작품과 삶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의 평가를 완전히 틀렸다고 만은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독자들은, 그런 류의 평가는 색을 짙게 입힌 선글라스를 착용하고서는 카프카와 그의 작품을, 그들이 스스로가 쌓아 올린 좁은 울타리 안에 몰아넣어 가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지를 우려가 크다는 것 또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카프카는 인간의 내면과,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탐구자였으며, 그 속에서 실존을 향해 가는 ‘순수하게 자유로운 길’을 찾아 나섰던 사상가였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세상과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해 고뇌 속에서 글을 쓴 작가였다.
카프카는 또한 자신의 가정과 직장을 포함한 사회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그 여러 곳들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있지만 그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았던, 이 세상에 분명 머물기는 했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는 않았던 ‘현실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가 초월해 버린, 그래서 고독한 작가’였다.
다시 한 번 카프카의 말을 떠올려 본다.
"존재한다는 것은 단지 그곳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속계俗界의 시간으로 보자면 제법 긴 시간 동안 그의 뒤를 쫓아 다녔고 지금도 그리하고 있으니 이젠 그에게 말 몇 마디 건넨다고 해서 그리 흉 크게 잡힐 일 따윈 없겠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 그를 대접하지는 못할지언정 그의 밥그릇을 축낼 일은 적어도 없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지금 이곳이 내가 속한 바로 그 곳인가.”
“지금의 나는 진정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은 질문은 던지기만 할 뿐, 그것에 대한 답변이나 실마리를 제대로 남기질 않았으니, 그에게 질문은 던지게 되는 것은 순전히 그의 탓일 뿐이다.
카프카는 자신을 에워싼 온갖 부조리한 상황들에 대한 투쟁의 수단으로 글을 쓴 것이며, 그 부조리는 세상의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자신의 투쟁을 위해서는 도저히 세상과 타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카프카는 그것을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삼았고, 그 방식으로 자신을 재코드화하였다.
그렇기에 카프카는 아나키스트였으며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이며, 카프카는 소수자로서 아나키스트 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카프카는 분명 고독한 몽상가이자 사상가였고, 구도자이자 탐구자였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영토를 닦았고 그 영토 안에 ‘부조리’와 ‘실존’이라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려 하였다.
그것이 카프카의 재영토화였다. 그런 카프카의 재영토화는 어떤 면에서는 성공한 것일 수 있고, 다른 면에서는 실패한 것일 수 있다.
카프카의 작품을 단지 병적인 몽상가의 몽환으로 보는 이들의 눈에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고독한 탐구자이자 위대한 사상가로 보는 이의 눈에는 성공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제는 “아나키스트가 모든 사회적 시스템과 타협을 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아나키스트는 자신이 닦은 영토에서는 모든 시스템과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카프카의 작품들은 그의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시스템과의 타협의 결과물인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몽상과 환상 같은 상황만이 아니라, 사회적 교리 또한 찾아볼 수도 있다. 그의 교리는 결코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이지 않기에, 비록 사회가 그런 류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움직여지고 있긴 하지만,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해석을 가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카프카의 작품에 그런 식의 해석을 가하게 된다면, 카프카와 그의 작품을 너무 협소하게 들여다보는 심각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그로 인한 심각한 왜곡을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카프카의 작품은 순수한 사회적인 교리이자 사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권위에 대한 반감에서 오는 반항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아나키즘적인 불화, 그 속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며, 답에 가까이 다가서려 노력한 카프카의 자화상을 그의 작품에서 찾아낸다면, 카프카를 아나키스트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뉴욕에서, Dr. Franz Ko(고일석, 교수, 동국대학교(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