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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온 먼 소식

고향에서 온 먼 소식


며칠 전부터 귀가 살 살 간지럽더군. 뭔 일인가 했더니 살짝 데워진 바람이 실어온 그곳의 소식 때문이었던 게야.

그 참, 세월이 언제 이렇게 지나가버린 겐지 이젠 더듬어보는 것조차 까마득한 일이 된 것 같아.

그래도 말이야, 더 잃어버리기 전에 이렇게라도 되새겨볼 수 있게 되었으니, 좀 뭣한 소식이 섞여있긴 하지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


고불하게 난 들길을 쭉 지나 한참을 걸어가면 집 몇 채 듬성한 동네가 낮은 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지.

가지인지 잎인지 몰라도 뾰족뾰족 가시 날카로운 탱자나무가 성질 사나운 이장네 집 담장처럼 이어진 동네 길 끝자락엔 어른들이나 아이들이 꺼려하던 마당 넓은 집 한 채가 있었어.


외졌다고 하기엔 동네에서 그리 걸음 멀지 않던 그 집 한쪽 구석에선 소죽 끓이는 냄새처럼 구수한 기기묘묘한 연기자락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하늘을 향해 기어올랐지.


그 유래에 대해선 몰라도 그냥 '숯골마을'이라 불리던 그 마을의 그 집에는 검은 가루 묻은 얼굴에 허연 눈을 껌뻑이던 키 작고 몸 마른 아저씨가 있었는데, 아마 3학년 때였나, 같은 반이었던 한 계집아이의 아빠라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해.


숯골마을 산다고 하면 이웃마을 한참 지난 고개 너머 사람들까지도 무시를 하였다고 들었으니 그 아이에 대해서도 특별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어찌되었건 워낙 돌아다니길 좋아했던 나는 몇 번 그 동네까지 혼자 들어갔고 그 집 앞 가시나무 뒤에 몸 가리고 숨어 기웃기웃 쳐다보곤 했지.


십년이라는 단위가 몇 번 지난 오늘 아침, 우연하게 연락 닿은 그 시절의 친구와의 통화에서 마침 그 동네 얘기가 나왔어.

방향이랄 것 없이 투두둑 튀어나온 몇 토막 이야기는 마을 앞을 흐르던 개울물처럼 한참을 이어졌지.


내가 살던 동네보다 숯골마을과 더 가까이 살았던 그 친구는 그 집과 그 아저씨에 대해 몇 가지 더 알고 있는 것 같더군.

그 아저씨가 김씨 성을 가졌다는 것과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시의 끝자락이었지만 여느 시골마을이나 진배없었던 그 동네 또한 다른 마을이 모두 그리되었듯, 개발이라는 구호아래 금방 밀려 없어졌다는 것과 그 이후로도 아저씨는 숯골마을이 있던 인근 어딘가에서 어찌어찌 살아갔다고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었지.

내가 다른 마을로 이사한 후에 벌어졌던 일이었으니 나로서는 당연히 몰랐을 수밖에.


어쨌거나 그 집에 살았을 것 같은 동갑내기 여자아이에 대해서도 물어보았지만 그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더군. 어쩌면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살아오는 동안 이 기억 저 기억이 뒤섞이다보니 뭔가 혼동이 있었을 수도 있을 거야.

가끔은 지나간 일에 대한 기억이란 게 종종 미덥지 못할 때가 있더라고.


한 가지 더해진 이야기는 그 김씨 아저씨가 이미 세상을 떠난 것 같다는 말을 그 친구 또한 어느 누군가로부터 언뜻 들은 것 같다는 거야.

하긴 우리 나이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이웃집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사람들 눈치 보느라 큰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던 숯쟁이 김씨 아저씨는, 손톱 밑까지 새까만 손으로 검은 숯을 매만지던 시꺼먼 삶을 그제야 벗어나신 것일 거라고, 확신 어린 추측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더군.


그 순간 나 또한 추임새를 더해 넣었던 것 같아.

몇 걸음 떨어져 그를 훔쳐본 적이 있던 그 시절의 어린소년이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어 듣게 된 그의 희미한 소식은 그리 특별하거나 슬퍼할 만한 것만은 아니야.


혹자가 얘기하는 것처럼, 사람의 인생이란 게 그저 거쳐 지나가는 어떤 공간에서의 흔적 남겨지지 않는 공허한 행위에 불과하다면 김씨 아저씨의 그 숯골마을 집은 그의 삶이 머물다 떠나갈 임시거처였던 게야.

묵은 세월은 괜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나봐.


잿빛으로 물든 삶에 들려있던 검은 숯의 반짝임이 그에게 대체 무엇이었는지, 그곳의 기억을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는 건지, 그 기억은 혹시 채색으로 왜곡시켜버린 또 다른 추억은 아닐지, 숯골마을과 김씨 아저씨, 그 계집아이는 그 시절 정말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아득하기만 해.

그 친구에게 몇 가지 더 물어봐야 할 것 같아 핸드폰을 뒤적였지.

그런데 어쩌지, 남겨진 통화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을. 지워진 것인지, 혹 그것이 깨어나지 않았던 꿈의 부스러기였던 것인지는 알 수 없어.

어쩌면 꿈과 현실이란 그저 얇은 막 한 겹으로 살짝 나누어진 좁은 무대와 그 뒤편일 뿐인 게 아닐까, 궁금해져.


어쨌거나 괜찮아, 이젠 더 이상 귀가 간지럽지 않을 것 같아. 오늘 하루는 온통 눈 뜬 오후만이 있을 것 같은 날이니깐.


뉴욕에서, 고일석(Dr. Franz Ko)

//바람이 전해온 것 같다. 기억조차 아련한 것에 대한 괜한 궁금증은 밤잠을 설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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