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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늘을 난다는 것은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꿈은 신화 속 주인공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절대 실현할 수 없는 상상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이룰 수 없는 것을 동경하는 일은 욕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무언가를 동경하는 것과 어떤 것을 욕망하는 것은, 그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고유한 속성이다. 

철학자 들뢰즈(질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1.18 ~ 1995.11.4)가 인간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비단 물리적인 현상에서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복잡한 의미를 갖고 있다.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 하늘을 날 수 있게 된 지금에 와서 그 행위는 ‘몸이 허공에 떠 있는’ 것 보다는 형이상학적인 의미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것은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아름다운 꿈이다. 

하지만 그 꿈은 치명적인 위험을 감내해야만 하는 커다란 도전이다. 

동경(憧憬)에 머물러 있을 때는 아름답지만 욕망에 휩싸이게 되면 위험해지게 되는 것은 꿈이 가진 양면성이다. 

인간의 양면성이 꿈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신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다. 

욕망의 격발작용은 도전이라는 행위를 발현시킨다. 

인간이 욕망하는 존재라는 것은 인간은 도전의 본능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에게 도전할 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신에게도 도전장을 내미는, 실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위조차 감행하게 된다. 

신에 대한 도전은 대게의 경우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지만 인간은 그것조차도 ‘아름다운 도전’이었다고 미화하고 있다. 


―――――― α ――――――   

  

그것이 무엇에 대한 도전이건 간에 추락은 도전에 대한 대가라 할 수 있다. 

대가가 따르지 않는 도전이란 없다. 

이카로스의 추락 또한 도전에 대한 대가다. 

하늘을 향한 이카로스의 도전은, 이카로스 자신에게나 그 아비 다이달로스에게나, 비참한 결말로 이어진 불행한 사건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일이 한 젊은 인간의 아름다운 도전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이카로스의 도전에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에게 그 도전은 단지 동경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욕망하지 않은 방관자의 시선으로 이카로스를 바라볼 뿐이기에 오직 그들의 주관적인 생각만이 객관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 α ――――――     


“Adventure is not Free.”란 말처럼 도전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도전하는 이는 어떤 식으로건 간에 대가를 지불하야만 한다. 

파에톤의 이야기에서처럼 신의 노여움으로 인한 것이건, 이카로스 이야기처럼 날개의 물리적 손상으로 인한 것이건 간에, 추락은 욕망하는 자의 오만함과, 이성적인 판단과 관리의 부족함, 그리고 대처의 미숙함이 부른 치명적이고 값비싼 대가인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인간은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인간은 누구나가 부족한 존재이기에 반드시 추락해야할 이유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도전이 없다는 것에서 욕망의 비완전성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미궁 라비린토스를 탈출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다이달로스는 날개는 만드는 과정에서 커다란 실수를 범하게 된다. 

어쩌면 다이달로스는 그것을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고 단지 주의를 기울이면 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것은 다이달로스의 미인지적 실수가 인지적 착각에 의한 것이었다. 


실수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행위에 이어지는 결과에 따른 것일 뿐이며,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다. 

실수인 것이 분명하다고 해도 결과가 좋으면, 그것이 의도한 것이건 아니건 간에, 실수로 여겨지지 않게 되고, 스스로는 실수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해도 타인에게는 실수라고 여겨지는 것이 있게 된다. 


다이달로스의 실수는 날개의 제작과정에서 열에 취약한 밀랍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미궁에 갇혀 지내고 있던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수 있다. 

비록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빈약한 상황이었지만 미궁을 탈출하겠다는 다이달로스의 욕망은 멈추지 않았고 새의 깃털과 밀랍은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재료였을 것이다. 

다이달로스는 이 실수를 단지 ‘주의를 기울이면 되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 α ――――――     


‘재료의 혼동’이란 선택할 수 있는 재료가 다양할 때나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다이달로스가 날개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인간의 창의력은 흔히 부족한 것을 해결하려는 괴정에서 싹을 틔우게 된다.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만든 날개라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들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니,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가 완전히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일 수 있다. 


신화라면 분명 어떤 신비스럽고 신기한 재료들을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도, 이 이야기에서 다이달로스는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것들을 ‘꿈을 이루는’ 재료로 사용하였다. 

어쩌면 마법이란 완전히 신비로운 것만은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 수 있다.


다이달로스가 밀랍으로 날개의 구조물에 깃털을 붙인 것을 두고 과학적 허술함을 운운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부족한 독자적 상상력의 한계에서 온 것이거나, 도전을 두려워하는 이의 좁은 가슴이 이끌어낸 자기변명일 뿐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 α ――――――     


<다이달로스의 날개 또는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신의 권능에 도전한 인간의 비참한 결말로 해석하건, 젊은 이카로스의 강인한 도전 의식으로 해석하건 간에 분명 다이달로스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았던 최초의 인간이자 그로 인해 자신의 외아들을 잃은 애처로운 아비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를 옮긴이가 무엇을 의도한 것인 지까지 애써 파악하려 하기보다는, 낮잠에서 꾼 꿈이든 밤잠에서 꾼 꿈이든, 그냥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만의 꿈을 꾸는 것이 좋겠다.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존재이기에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꿈은 누구나의 것이고 그 꿈에는 어떤 제약을 두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늘을 날겠다는 인간의 꿈은 영원한 진행형이 된다. 꿈을 꾸는 것은 인간의 일상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꿈꾸지 않는 사람은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 α ――――――     


글을 마무리하다 말고 창밖에 펼쳐져 있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태초부터 빛이 그곳에 있었고, 그 이전에는 어쩌면 어둠이 그곳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때는 어땠을까. 

시간을 구분하지 않는 이에겐 어둠인지 빛인지, 낮인지 밤인지, 지나간 때인지 지금의 때인지는 의미를 잃는 법이다. 

어쩌면 꿈은, 눈을 뜬 상태에서도 꿀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인지 현상인지 모르겠다. 

무한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 하늘 저 멀리에서 무언가 작은 점 하나가 꼬물꼬물 일렁거리고 있다. 

눈을 찌푸려 한참을 올려다 본다. 

무언가의 하얀 날개짓이 잔바람 같은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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