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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로스의 날개>인가 <다이달로스의 날개>인가

<이카로스의 날개>인가 <다이달로스의 날개>인가, 이야기의 실제에 대해                        

아비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 부자에게 일어났던 그날의 비극적인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갇혔었다고 하는 고대 크레타 섬의 미궁 라비린토스(Labyrinthos)와 그것과 관련되어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첫 번째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그들 부자가 미궁에 갇히게 된 원인에 대한 것이다.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는 왜 미궁 라비린토스에 갇히게 된 것일까."


그들이 미궁에 갇히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와 관련된 것이다. 뛰어난 건축가이며 조각가이자 발명가였던 다이달로스는 크레타 섬에서 미노스 왕의 환대 속에서 안락한 삶을 살게 되었고 그러던 중 왕의 시녀와의 사이에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외아들인 이카로스이다.


당시 크레타의 왕비인 파시파에는 다이달로스의 도움으로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와 정을 통하여 임신을 하였고 황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미노타우로스(Minotauros)라는 반인반수의 괴물을 낳게 되었다.

당연히 파시파에의 남편인 미노스 왕은 크게 분노하였고 다이달로스에게 이 괴물이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최고의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들도록 하였다.


문제는 “영원히 지켜지는 비밀이란 결코 없다.”는 것에 있었다. 결국 미노스 왕은 다이달로스가 그의 왕비 파시파에와 괴물 황소 간의 간음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분개한 나머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인 이카로스를 미궁 안에 함께 가두어 버렸다고 한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그들 부자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의 희생자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두 번째 이야기는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미노타우로스를 미궁에 가둔 미노스 왕은 해마다 일곱 명의 소년과 소녀를 이 괴물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아테네의 영웅인 테세우스(Theseus)가 제물과 함께 미궁으로 들어가서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테세우스를 연모한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가 다이달로스에게 테세우스가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부탁하였고, 이에 다이달로스가 실타래를 주면서 미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미노스 왕은 분노하였고 이것으로 인해 다이달로스는 그의 아들인 이카로스와 함께 미궁에 갇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다이달로스가 자신의 손으로 설계하고 만든 미궁 라비린토스에 갇히게 된 사건의 원인은 다이달로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노스 왕의 왕비 또는 그의 딸에게 있는 것이었다.

다이달로스는 사건들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라 방조자이자 협력자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미노스 왕의 분노는 그 사건의 당사자인 자신의 아내 파시파에에게나 딸 아리아드네에게로 향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왕비에게 있건 공주에게 있건, 그 사연이 어찌 되었건 간에 다이달로스는 그의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자신이 만든 미궁인 라비린토스에 갇히게 되었다.

그들 부자로서는 분명 억울한 일이었겠지만 상대는 왕과 왕비, 공주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왕비나 공주가 연루된 그 일들에 대해 다이달로스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린 것을 보면 크레타 왕은 아주 이기적인데다가 멍청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런 왕의 환대를 즐기며 살았고 그 와중에 왕의 시녀와 정을 통해 아들 이카로스까지 얻었으니 다이달로스 또한 전혀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유와 판결이 무엇이었던 간에 미궁에 갇힌 이상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그 미궁을 벗어나는 것뿐이다.       


결국 다이달로스는 그의 천재적인 머리와 손재주를 이용하여 미궁에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해내었다.

그것은 오직 하늘 길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갇힌 미궁 라비린토스는 건축물로서는 너무나도 완벽한 미로였기에 지상을 통해서는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미궁을 설계하고 만든 장본인인 다이달로스는 잘 알고 있었다.


하늘을 날기 위해 다이달로스는 새의 비행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연구하였다.

그 관찰과 연구의 결과물이 밀랍으로 새의 깃털을 구조물에 붙여 만든 커다란 날개였다.

그들 부자는 그 날개를 어깨에 붙이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미궁을 탈출하게 되었다.     

    

이카로스는 너무 낮게 날거나 너무 높이 날지 말라는 다이달로스의 주의를 잊어버리고, 또는 무시하고 하늘 높이로 날아올라 태양 가까이에까지 도달하였고, 결국에는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깃털을 붙인 밀랍이 녹으면서, 또는 깃털이 타버리면서, 바다에 떨어져서 죽게 되었는데 이카로스가 빠져 죽은 그리스의 바다를 '이카로스의 바다'라는 뜻에서 이카리아 해라고 부르고 있다.


      ―――――― α ――――――     


오비디우스가 전한 이카로스의 날개에 얽힌 이야기의 내막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사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목과는 달리 이카로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 이야기가 <이카로스의 날개>라는 제목으로 알려지게 된 것에는, 흑막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뭔가 가려져 있는 배경이 있음이 분명하다.


사실 이 이야기가 얽혀 있는 사건의 직간접적인 원인제공자이자 피해자이며, 공학기술자이자 예술가로서, 라비린토스라는 미궁과 그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 날개를 만든 장본인은 다이달로스이다.

그래서일까.

다이달로스의 삶과 모험, 성취와 고뇌를 쫓는 것이 더 깊은 사유의 바다를 항해하도록 만들고 있다.  


날개를 만든 것은 다이달로스이고 다이달로스 또한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을 날아올라 미궁을 탈출하였다.

따라서 하늘을 나는 날개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이카로스의 날개>라는 제목보다는 <다이달로스의 날개>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이 더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판단이란 게 어디 이성적이기만 한 것인가.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기 일쑤이고 환경이나 분위기에 휘둘리는 것이 인간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다이달로스가 미궁 라비린토스를 탈출한 사건에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여서 ‘날개, 미지의 세상에 대한 인간의 동경’으로 각색해서 채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제목만을 보고 상상하는 이가 있다면 그의 가슴에는 <각색되고 채색된 날개 이야기>가 자리 잡게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 인간이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보고, 그것을 사실로 믿게 되는 편향된 존재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한 편향 또한 지극히 인간적인 일일 뿐이다.      


알고는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이달로스라는 중년의 아비보다 젊고 싱싱한 아들 이카로스에게 더 매력을 느낀다는 것을.

주름 낀 이마에 햇볕에 그을린 피부, 퉁퉁한 뱃살에 어쩌면 머리까지 훤하게 벗겨졌을 다이달로스라는 기성세대보다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물기가 온몸에 팽팽하고, 젊고 잘생긴 이카로스의 도전과 죽음이 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신화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우화와도 같이 은밀한 교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이제 현명한 독자라면 오비디우스가 그들 부자의 비행을 목격한 이들로 '어부와 목동과 농부'를 지목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비디우스 입장에서는 '어부와 목동과 농부'라는 대중을 대표하는 이들이 그날의 사건을 목격했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쨌든 땅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태생적 운명을 하늘이라는 신의 영역으로 날아오르도록 안내한 것은, 비록 그 사건으로 인해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잃었다고는 해도, 다이달로스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비극은 카타르시스로 이어지는 법이다.

독자들은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만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다이달로스 부자의 <날개 이야기>를 하늘을 향한 인간의 도전으로 본다면, ‘이카로스의 도전’이 주제가 아니라 ‘다이달로스의 도전’이 주제라고 보아야 할 수 있게 된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가장 소중한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비록 하나뿐인 아들이라 하더라도, 다이달로스는 알고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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