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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선과 악 그리고 믿음과 인간

첫 번째, 선과 악 그리고 믿음과 인간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라거나 <절대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선한 것> 또는 <절대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것이 세상의 태초(천지가 창조된 때)부터 결정된 것이라면 그것들 또한 신의 창조물이니, 혹시 나름대로의 어떤 역할이 그것들 각자에게 주어져 있지는 않을까. 

또는 그것들이 인간의 태초(인간이 처음으로 이 지구상에 나타난 때)부터 있어온 것이라면 인간의 삶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지어진 것은 아닐까.


특정한 종교에 묶여 있는 가슴의 눈을 조금 크게 벌려 보자. 

교회에 가면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하고 절에 가면 “부처님이 계신다.”라고 말을 한다. 

이 표현이 ‘절대적인 존재’의 실체에 관한 것이건 아니면 또 다른 무엇에 관한 것이건 간에, 인간의 믿음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고 부처님 또한 그곳에 계시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믿음이 헛되지 않으며 또한 세상에서 가장 지적인 존재인 인간이 결코 헛된 것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물론 이것 또한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가정일 수 있지만, 그분들은 어디엔가 꼭 계시고 있으며 또한 계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우리라는 인간에게 ‘영적인 존재’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누가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든 것일까. 

대체 무엇이 지금의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곳에는 누가 계시는 것일까. 

‘우리’라는 인간에 대한 질문은 끝을 보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분은 물적인 상태로 실체 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영적인 무엇으로 계시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믿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영역이나 관념의 영역에 계신 것일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이것을 바라보면, 믿음의 중심에는 인간 자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믿음의 존재는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물리적인 실체나 현상으로 찾아지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먼저 믿음이라는 관념적 현상을 통해 그 존재를 인지하려는 노력이 가장 종교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믿음 자체가 먼저인지 믿어야 하는 대상의 존재가 먼저인지, 그분이 계시기에 믿는 것인지 믿음으로 인해 그분이 계시게 된 것인지를 어떻게 규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어찌 되었건 간에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믿음의 중심에 두면 각도가 조금 달라진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나의 생각과 마음, 나아가 나의 믿음으로 실체 시킬 수 있다면, 이러한 놀라운 능력을 가진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지금의 이곳에 있게 된 것일까. 

뫼비우스의 띠를 도는 것처럼 사색의 산책길은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차이는 그 띠의 길이에만 있을 뿐이다. 


세상의 중심에 신이 아닌 인간을 두더라도 사유에 사유를 거듭하다보면 결국 인간이 서 있게 되는 것은 절대적 존재의 곁이다. 

우리는 결코 그분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아니지만, 비록 그분들 같이 될 수는 없지만, 그분들을 인지할 수 있고 믿음의 한가운데에 그분들을 모실 수 있을 만큼이나 대단한 능력을 가진 실체로서 이곳에 있는 나와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돌아보면 구석구석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어찌 이토록 완벽하게 그분들을 인지하고 믿으며, 그분들에 대한 사색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영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단 말인가.


물론 때론 그분들의 존재를 부인하기도 하지만, 부인한다는 것은 시시콜콜 따져볼 만큼이나 그분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고, 부인한다는 것이 결코 그분들의 존재를 존재치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결국에는 그분들에 대한 인지는 더욱 강해지게 된다. 

그분들은 분명 실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실체이기에 인간은 그 실체를 미처 인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부인한다는 것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알고는 있지만 어떤 것(들)이 그것에 끼어들어 회피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그런 생각과 행동을 일삼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 그분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 또한 가장 인간다운 행위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을 단지 자연적인 진화를 통해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만 보자니 인간의 삶이란 게 한낱 지나가는 바람 같이 허허하게 느껴지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 동력이 겨우 인간의 염세적인 감상에서 나오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 염세가 만들어내는 허무의 짙은 안개를 어떻게 걷어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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