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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허위의 세상

진실과 허위의 세상                        

오랜 시간의 관찰을 통해 알게 된 것 중에 하나는, 이 세상은 ‘진실’과 ‘허위’라는 두 가지의 요소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실이란 더 이상 나눌 수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으며, 나눌 필요도 없는, 그래서 ‘완전한’ 하나의 개체이다. 따라서 진실은 그 어떤 변형도 허락되지 않고 오직 진실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완전함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 윤곽이 선명하게 잡힌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어느 누구도 진실이란 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진실을 진실로써 인식하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허위’일뿐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사실 이것에 대해 ‘문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본질에 관한 것이기에 결코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인간의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인식 능력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인 '진실'에 있어서조차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난 진실을 알고 있다.”는 말은 “나는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자기 고백이거나 스스로의 독백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난 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야 말로 전혀 부끄러울 일 없는 가장 진솔하면서도 인간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게 된다. 

    

―――――― α ――――――     


일상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현상은, 끊임없이 반복하여 변화하고 있는 사물에 대한 ‘바깥쪽 면 살펴보기에 대한 가시적인 서술’ 일뿐이기에 어떤 현상에 대해서는 시간을 더욱 투자하고 노력을 기울여 그 내면을 면밀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세상의 현상은 그 어떤 것도 결코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성장하거나 소멸하지 않고 그때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오직 인간의 기억에서 기거하고 있는 현상이라든가,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고 있는 노인의 눈에 맺힌 현상 같은 것일 뿐이다. 

그것을 ‘추억’이라고 불러도 좋겠고 ‘기억의 되새김질에 의한 발현’이란 이름을 붙여도 괜찮겠다. 


현상은 끊임없이 제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이기에 그 과정에서 반드시 색바램이나 어긋남, 왜곡과 같은 변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살펴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쩌면 살펴보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제대로 된 현상의 서술에는 과학적이지만 직관적이고, 경험적인 접근과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적당한 가설을 세우고, 찬찬하게 살펴보고, 꼼꼼하게 의심하고, 수정하고 다시 살펴보기를 반복하고, 앞서 세운 가설을 다듬어 손질하는 과정을 피관찰 현상의 변화만큼 되풀이하는 것이 이러한 현상을 서술하는 데에 필요한 방식이다. 

그래야만 의도되지 않은 오류를 줄일 수 있게 된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현상이라는 것의 범주를 '겉보기를 통한 눈의 인지'에서 ‘속 읽기를 통한 가슴의 인지’로 넓혀본다. 

그렇다면 현상의 내면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지혜라 부르는 것의 눈길을 그것에게 보내 보면 어떨까.


어쩌면 지혜의 눈을 통한 현상의 살펴보기는, 비단 현상의 서술에만 머물지 않고 ‘가슴과 머리의 작용에 의한 내면의 서술’에 이르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지혜라 일컫는 것 또한 허위가 아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야만 할 때가 있다. 

그래도 아직은 관찰하기를 통한 서술을 멈출 때가 아니다. 그것이 어쩌면 허위로 난 길을 통해 진실로 다가서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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