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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지혜로운 자, 경계 들어 서기

프란츠 교수의 철학적 에세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 경계 들어 서기                             

“물리적인 경계보다 사람을 더 옥죄는 것은 정신적인 경계이다.” 

스스로의 의지나 힘으로는 결코 허물어 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떻게 해보겠다는 시도를 하게 된다면 괜한 일이 될 것만 같은,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두고 지내야만 하는 자신만의 경계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그것을 응시하고 있다가 보면 그 형태가, 겹겹으로 또는 층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대게의 것은 한두 단 정도로 낮거나 높다고 해도 사람의 가슴 높이를 넘지 않을 정도로 쌓아 올린 담장의 형태이거나, 한 두 겹으로 살짝 내려놓은 얇은 막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의 두께를 가진 것이거나 가마득할 만큼이나 높게 쌓여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게 된다. 


두께를 가진 경계의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높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두꺼운 정도나 재질에 따라서는 그 너머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주 힘들어지거나, 아예 들여다볼 수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높이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다. 사람의 키를 훨씬 넘어 쌓아 올린 경계는 그 너머를 차마 들여다볼 엄두조차 낼 수 없게 만든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그 경계 너머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작은 틈이라도 찾으려고 노력하거나, 도구나 기구를 이용하는 것과 같이 다른 어떤 방법을 찾아 나서거나, 그 경계 자체에 대해 더욱 자세한 관찰이 필요해 진다.


―――――― α ――――――     


무엇인가의 너머를 들여다보려 한다는 것, 또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좀 더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훔쳐보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이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방법이나 과정을 통해 ‘알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만 결국에는 ‘아는 것’이 되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일 수 있는 답’은 ‘잘 다듬어진, 제대로 된 지식을 갖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계를 들여다보려는 끈질긴 행위는 지식에 대한 욕식을 일으키게 되며, 그 욕심은 앞으로만 달리고 싶은 내적 욕망이 만들어 낸, 오직 자신에 의한, 자신만을 위한, 자신만의 당근과 채찍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경계의 바로 앞에 서서조차 지식에 대한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니, “오직 지식만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치기어린 문구가 젊은 날의 어느 날엔가 지어낸 교만한 신념이 아니라, 비록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어느 사원의 현판에 새겨져 있었던 누군가 위대한 이의 말씀은 아니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쌓여가는 지식의 더미는 때로는 지혜의 눈을 멀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지식이 지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지혜는, 어떤 지식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리곤 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서로 다른, 또는 상반된 두 개의 면이 있게 된다. 

그래서 세상 만물에게서 찾아지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 이중성, 또는 양면성인 것이다. 


―――――― α ――――――     


모든 ‘정(正)’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곁에는 그것의 ‘부(負)’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상의 절반은 정에게 속해 있고 나머지 절반은 부에게 속해 있다 다만 상황여하에 따라 발현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정과 부가 만나는 경계지역에는 ‘합(合)’의 영역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것의 크기는 그것을 생성해낸 사람이 가진 지식의 질과 양에 따라 크게 다르게 된다. 

그 합의 영역에 자리 잡은 것들이 지혜의 씨앗일 거라고 믿은 적이 있지만, 지금도 그렇다고는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다. 


합의 일부분은 정의 영역에 걸쳐 있고 나머지 부분은 부의 영역에 걸쳐 있다. 

합은 적응성을 가진 영역이다. 

그래서 합은 자신만을 위한 배타적인 영역을 별도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합은 정이면서도 부이고, 정도 아니면서 부도 아닌, 다소 어정쩡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합의 포용력은 정이나 부보다 강하다.


정과 부는 완전히 다른 것이긴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래서 배타적이란 것을 부정적인 의미에만 연결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때론 그 경계의 간극이 너무 넓어지게 되면 정과 부는 제대로 된 서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때가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합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혜를 늘린다는 것은 정과 부의 배타적인 대립 속에서 합의 영역을 넓혀가는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합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합의 영역이 지혜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따스한 햇살이 쏟아지는 비옥한 토양이 지천으로 깔려 있고, 때 맞춰 촉촉한 빗물이 내리는 이데아는 아니라고 해도, 지혜를 찾아가는 오솔길이 그곳을 지나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의 영역을 넓힐 수 있을까. 경험과 글을 통해 지식을 쌓아간다면, 쌓이는 지식만큼이나 합의 영역을 넓힐 수 있을까. 

그만큼 지혜가 늘어가게 되는 것일까,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내놓을 수 없기에 지혜를 좇는 자의 ‘답 같은 답 찾기’, ‘답일 수 있는 답 찾기’는 계속해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식이 제공하는 어느 한자리에 매김 되기보다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색과 걸음으로 마주친 질문과 현상에 스스로의 정신과 몸을 기꺼이 던져 넣어 그것의 실체를 쫓아다니다가 보면, 계속해서 지식을 갖추어가다가 보면, 정과 부가 만나는 경계의 간극 속에서, 경계 저 건너편에서, 합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걸음을 어찌어찌해서라도 계속해서 디뎌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경계 들어서기는 나 자신을 지혜의 장에 재배치하는 것이기에 경계 들어서기를 멈추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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