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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길을 걸으며                             


행여 혼자 떨어지게 될까 봐, 혼자서만 남겨지게 될까 봐, 그것이 비록 얇디얇은 한 겹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부여잡으려고 손을 휘저으며 살아왔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빈손으로 허공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 순간들을 버틸 수 있었으니. 

‘빈손 젓기’는 살아남기 위한 자기 위안이었다.  


빈손 젓기의 끝에서는 밤바다의 검은 파돗소리 같은 허망함이 가슴을 울리게 된다. 

그럴 때면 어정쩡하게 접혀 있는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는 “체념이란 단어가 뿜어내는 향기가 이렇게도 아름다울 수 있다니, 이제라도 그 향기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게 되었으니, 지나간 것들 쯤이야 지워버린다고 해서 원망 받을 일 따위는 없을 거야.”라고, 주술 같은 혼잣말을 되뇌며 터덜터덜 길을 걷곤 했다. 

그렇게 걸어가다가 보면 어느 사이엔가 달빛이 밤길을 밝혔었고 ‘체념하기가 곧 망각하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길을 걸으며    

 

늘 비어있다 

그러니 허전할 수밖에     

그래서 서성이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여긴다     


길을 나선 걸음은 쉬어갈 뿐 

어느 곳에서도 멈춰 서지 않는다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가면 

다시 길을 걸어야만 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는 모르겠다 

       

가다 보면 간혹, 유독 걸음을 서성이게 만드는, 그래서 꼭 멈춰 서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곳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것이 본능의 인력 때문인지, 주저함의 척력 때문인지, 호기심의 흡입력 때문인지는 예전의 그때처럼 지금도 잘 알지는 못한다. 


어찌 되었든, 그 서성임으로 인해 걸음이 더뎌지긴 해도 결코 너무 늦어지기 전에 그곳의 문을 밀고 나와 다시 길 위에 발걸음을 디디게 된다. 

들어서야 할 때는 제대로 몰랐지만 나와야 할 때는 어떻게든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자신의 아둔함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한다.


―――――― α ――――――     


지금 발걸음을 받치고 있는 이 땅바닥이 황토 먼지 날리는 마른 들판의 어느 흙길인지, 들판 가운데에 길게 난 잔풀 우거진 어느 호젓한 좁은 길인지, 깊은 산속의 나무 숲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어느 오솔길인지를, 발바닥의 감촉만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어떤 실마리조차 찾아낼 수 없는 이런 경우에는 언젠가 본능이 알아차리게 되는 때까지, 우물쭈물 그냥 서성이기만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분명하게 분간 할 수 없는 데도 이것이 길이란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어떤 길은 사람의 영혼에 새겨져서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의 태초와 인간의 태초부터 유전되어 온 운명이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혹시 자신의 운명에 끼어들 아주 작은 틈 하나라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까지 걸어온 지나간 길이나, 내일 걸어가게 될 새로운 길이나, 그리 달라질 건 없을 수도 있다. 

어느 하늘을 지붕 삼아 삶의 거처를 마련할지와, 뿌리 깊게 내렸다고 여긴 땅바닥을 어떻게 옮기느냐와 같은 사소한, 그러나 크게 어려울 수도 있기에 달라짐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선 들뢰즈 식의 질문에 빠진다 해도 좋다. 


“나는, 나 자신을 재배치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인가.”    

  

어제란, 어제와 그 어제 그리고 그 어제의 어제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어제의, 이미 지나간 날의 정해진 집합이다. 

반면에 내일이란 무한이 존재할 것 같은, 또는 무한히 존재하길 바라는 내일이라는 정해지지 않은 날의 집합이다. 


그러니 어제의 사소했던 것이 언젠가의 내일에는 커다란 것이 되기도 하고, 어제는 가슴 졸이게 했던 그것이 언젠가의 내일에는 평온을 주는 것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란 촉매가 일으키는 기억과 믿음에 대한 변성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느 사이 숙소로 돌아왔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다가 여기가 여행길에서 만난 쉴 곳인지 일상에서 마련한 쉴만한 곳인지, 깜빡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시간의 개념으로 보자면 지나간 오늘의 언젠가에, 오늘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길에서 내려섰다. 

이제 오늘을 어제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시간이다. 

늘 그래 왔듯이 배웅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괜한 근심을 만들 만한 것들을 굳이 잠자리로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제의 일은 언젠가 적당히 채색될 것이고, 아무리 애써본들 방향 없는 내일의 일을 미리 챙기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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