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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칼 융의 무의식

운명과 칼 융의 무의식

운명이란 무엇일까.

운명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만약 운명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삶에서 그것의 역할은 무엇일까.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어딘가에, 그것이 신체에건 정신에건 또는 삶에건, 들어붙어 있는 것이라면, 운명은 인간이라는 숙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일까.

만약 누구에 의해, 어떤 사유로, 어떤 방법과 방향으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인지에 대해 미약하게나마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면 혹시 나의 운명에게 말 한마디 넌지시 건네 볼 수 있게 될까.

그것의 정체에 대해 답이란 걸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여겨온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생각하는 자로써 살아온 지난 삶의 시간 동안, 행여 굴절은 있었을지라도 결코 단절 없이 질기게 이어져 온 원초적인 질문이다.


삶이라는 저작거리를 여기저기 기웃기웃 돌아다니다 보면 간혹 그 파편인 듯 모서리 날카로운 부스러기들이 햇살을 난반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보면, 살만큼 살았다는 혼잣말이 입 밖으로 세어나올만큼 살아보면, 반짝이는 것이라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챙겨둘 만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진정한 가치란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에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생각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기나긴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어떤 생각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난 이가 운명이 무엇인지, 이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 좀 더 그럴싸한 해석을 내놓았다.

흔히 칼 융이라고 하는 두 글자로 불리고 있는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 26 July 1875 – 6 June 1961)이 바로 그 사람이다.

칼 융은 “운명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운명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붙였다.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인간 삶이 나아가는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운명이라고 부른다."


운명에 대한 칼 융의 해석을 곰곰이 들여다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결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첫 번째는, 인간에게 있어 운명은 결코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 스스로가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해 자신의 운명에 관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두 번째는, 나의 운명은 무의식에 의해 결정지어질 거라는 끔찍하고도 잔인한, 약간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는 되지만, 그러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결론 앞에 서게 된다.


세 번째는, 내가 하기에 따라서는, 무의식을 어떻게든지 의식화할 수 있다면, 나 스스로가 나의 운명에 간섭할 수 있게 된다는, 더욱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상적인 결론을 마주하게 된다.


네 번째는, 인간의 운명이 무의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무의식이 바로 그 인간’이며 인간은 ‘유의미한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해 ‘그 실체’가 변화할 수 있다는 ‘무의식을 통한 인간 개조론’과,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한다면 그 인간 자체를 지배할 수 있다는 ‘무의식을 통한 인간 통제론’을 끄집어 낼 수 있게 된다. 무의식을 통한 인간 통제론은 무의식에 대한 작용을 통해 그 인간의 행위와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스 라이팅(Gas Lighting)의 역할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뇌에서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적게는 2퍼센트에서 많아 봐야 5퍼센트 정도라고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것의 정도는 피실험 대상이었던 인간의 교육 수준, 생활환경, 경제적 능력, 사회적 배경 등과 같은 후천적인 요인에 따라 높거나 낮게 표출되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는 아주 낮은 수치인 것만은 분명하다.

눈에 띄는 점은 인간의 ‘뇌의 활용 정도’에 있어 후천적인 요인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뇌라는 게 분명 인간의 몸속에 들어있고 인간이 사용하라고 주어진 기관인데도 많아봐야 겨우 5퍼센트 밖에 사용할 수 없다니, 이러한 연구결과들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나머지 95%의 영역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곳은 비밀의 정원이란 말인가.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무엇인가 은밀한 것들이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을 수 있다는 궁금증과 의심의 눈초리를 그것에게 보내도 좋단 말인가.

또한 2퍼센트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인간과 5퍼센트라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은 어떤 차이를 가졌단 말인가.

두 개의 거울을 마주보게 한 듯 하나의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많아봐야 5%의 활성화된 영역 중에서도 그나마 일부분은 무의식이 사용하고 있을 테니 실상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더 작아지게 된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우리가 사용하지 못하는 비활성화된 뇌의 부분 중에서 일부분이 무의식을 관장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는 주장이나 그렇지 않다고 하는 주장 양쪽 모두 아직까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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