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를 심판하다
신성을 탐구하려고 한다는 것은, 지적방랑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어느 날엔가 문득 발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일이다. 일단, 그 길에 발을 딛게 되면 무수한 혼돈과 혼동을 길동무 삼게 될 것이기에, 그것들의 지독한 현혹이 행여 여정을 잊어버리게 만들지 않도록 잇대어 끊임없이 경계하여야 한다. 또한 때를 찾아 지적유희에 빠져들어야 하지만 그것이 언제이며,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지적유희는 오직 지적성숙에 가까워진 ‘생각하기에 능한 이’에게만 허락되는 지적인 행위이며 지적상승을 이끌어 내는 마중물이기도 하다. 지적상승을 거듭해 가다 보면 지적유희의 알파(그 시작)가 철학이며 오메가(그 끝)는 신학이라는 바람의 전언을 살짝이나마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적유희가 점차 깊어지다 보면, 신성에 대한 자신의 무지함을 깨우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지함이란 것은 원래 모호함의 뒤에 숨어서 주절주절 자기변명만을 늘어놓기 일쑤라서, 아무리 생각하기에 능한 이라 하더라도 눈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모호함 속에서 신성을 느끼게 되는 아주 특별하고도 특이한 존재이다. 모호함으로부터 더욱 강한 느낌을 받게 되고 그래서 “분명 그렇다.”는 확신을 생성하는 역설 같은 상황에서 비로소 신성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역설이 진리의 현신으로 여겨지는 현상, 이성의 영역을 초월하여 반이성적인 영역에 배치되는 현상, 현상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주관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설명을 잔뜩 나열하도록 만드는 초이성적인 현상,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 그래서 억지처럼 보이게도 되는 실로 불가해하기 짝이 없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신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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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지적능력은 성숙의 단계에 한층 더 가까워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지적성숙을 완전하게 이루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눈앞에 있는 고개를 넘어서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 곳까지 다가서게 된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교만함은, 가까워진 것 같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여기가 바로 거기’라고 여기도록 현혹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세뇌하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인간의 자기세뇌 능력은 스스로를 ‘지적으로 이미 충분히 성숙한 인간’이라고 확신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 인간에게 수천 년 전 또는 그 보다 더 오래전에, 원재료 상태에서 만들어진 ‘절대적 심판론’은, 인간이 신성을 깨우치는 것을 막아서는 높고 두꺼운 벽이 되었다. 태초에는 그것이 신성을 지키는 훌륭한 성벽이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인간과 신성을 괴리시키는 방해물로 전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심판’을, 지적성숙의 단계에 그 어느 때보다 한층 더 가까워져 있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지적능력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해가 없이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지 않는다면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일진대 어떤 식의 해석이 이해를 도울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인간은 결코 신성에 의한 심판의 대상은 아니다.”라고 힘을 주어 말하고 있다. 또한 누군가는 그 주장에게 진리라는 꼬리표를 달아주고 있다. 무엇이 진리인 걸까. 인간은 과연, 심판이란 것을 받게 될까. 심판은 인간의 운명인 것일까. 그래야만 한다면 언제가 될 것이며 진정으로 그 법정에 서야만 하는 것일까. 피할 수는 없는 걸까. 혹시 지금이라도 돌이킬 수 있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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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나 뒤로나, 행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어느 것 하나 빈틈이 있을 수 없고 빈틈이 있어서도 안 되는 존재, 그렇게 절대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신’이라고, 신은 인간과는 달리 완벽한 존재여야 한다고, 인간은 믿고 있다.
그렇다면 그 완벽한 존재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대상 삼는 심판이라니, 인간이란,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부족한 존재인데, 그런 부족한 인간을 만들어 놓고서는 심판의 방망이를 휘두르려 한다니, 이게 대관절 무슨 얘기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심판하겠다는 것이며, 인간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단지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면 ‘심판’이라는 표현은 너무 거창하고 위협적이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은, 혹 인간을 만든 과정에 있었던 예기치 못했던 실수를 이제 와서 바로 잡아보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뜨게 만들고 있다.
인간은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지적으로도 진화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진화가 이미 지적 성숙의 단계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신은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일까. 만드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어떤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자신의 완전성에 흠집이 나게 된다고 여기는 것일까. 지적인 진화를 이룬 인간은 그러한 실수조차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신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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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아니라면, 만약 그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인간을 만드는 과정에서 ‘부족함’이라는 재료가 섞여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부족함 또한 인간을 만든 원재료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부족함’을 이유로 심판하려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에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지독히 모순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과연 심판의 대상인가.”
인간에게 심판이 내려진다면 그것은 신성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그 심판에서는,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식을 심판하려 드는 아비의 모습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행위를 두고 가부장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독재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 수 있다. 어쨌든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생겨난다면 그 아비는 스스로가 ‘못난 아비’라는 말을 듣고자 작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이 집을 나간다면 돌아올 것을 믿고 기다려주며, 돌아온 탕자를 씻겨주고 먹여주며,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아비의 진정한 도리가 아닐까. 이것에 대해, 그런 식의 생각은 인간에 대한 것일 뿐 신성에 대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대체 신성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독재라는 말조차도 무색하게 만드는 절대 왕권보다 더 지독한 것이 신성이란 말인가.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유한한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신비로운 존재가 인간이다. 삶의 끝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불가해한 존재가 우리이다.
한 인간의 끝과 함께 하나의 세상도 끝난다. 인간에게 끝이 없다면 신성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지구라는 공간에는 인간이라는 물리적인 존재와 신성이라는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누군가에 의해 함께 배치되었다. 신성은 인간의 정신적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고 인간은 신성이 있기에 ‘끝’을 향해 가는 두려움을 잊어가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신성에게 심판받기를 결코 바라지 않으며 신성은 인간을 심판하기를 또한 바라지 않을 수 있다. 누군가 신성을 잘못 해석한 것이거나, 의도적으로 왜곡하여 해석한 것일 수 있다. 진실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신성이 인간을 심판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실 뚜렷한 답, 답일 것 같은 답조차도 찾기 힘들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사색과 사유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능한 자,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영적인 존재,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