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쌓는 것도, 지혜를 깨치는 것도, 결국에는 스스로가 짊어진 봇짐과도 같은 것이다. 지식이란 스스로가 쌓아가는 것이고 지혜란 스스로가 깨쳐가는 것이기에 그 가운데에는 항상 '나'라는 인간이 서 있게 된다. 하지만 지식과 지혜를 구분하지 못하듯 무엇이 ‘쌓음’이고 어떤 것이 ‘깨침’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지혜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지혜의 실체는 하데스가 다스리는 지하세계 밑바닥에 숨겨져 있어 누구도 더듬을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가 된다는 것은 사막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찾아내려는 것과 같이 막연하면서도 어려운 일인 것이다.
허공을 두 손으로 휘저으며 위안을 뿜어낸다.
“무엇(what)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대상을 제대로 모르는데, 왜(why) 그것을 사랑해야 하는지는 당연히 알 수 없기 마련이고, 어떻게(how) 그것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 또한 이성적으로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다시 질문의 바람이 불어온다.
“지혜란 것의 실체는, 지혜를 사랑하려는 노력만으로도 더듬어지는 것일까.”
“지혜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근 비밀의 정원 한 구석에 가꾸어 놓은 빛깔 좋고 향기 좋은, 하지만 찾는 이 아무도 없는 꽃밭인 걸까.”
지혜에 대한 사랑이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미련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질 수 없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그것에 대한 사랑'이라 여기며 살아온 것일 수 있다.
지혜를 사랑하려는 노력을 넘어서 지혜를 향해 사랑을 갈구하는 자가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라고 불린다면 좋겠다. 어쩌면 지혜를 사랑하려는 허망한 짓을 멈추지 못하는 미련하기 짝이 없는 자가, 그 사랑에 지독하게 중독되어 버린 자가, 그것을 지적 유희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는 자가, 그래서 영혼조차도 어리석어 보이는 자가, 사색하는 자를 넘어 ‘사유하는 자’라고, 언젠가에는, 불리게 될 것 같다.
진정으로 사유하는 자가, 사유의 유혹에 빠져버린 자가, 내려놓을 수 없는 커다란 봇짐을 진 중년의 보부상 같은 자가, 지혜를 향해 다가서고 있는 자가 아닐까.
이 문장에서 보는 것처럼 아리스토테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phulosopher)이자 polymath라고 소개되고 있다. Polymath는 그야말로 박학다식한 사람, 천재적이라 할만큼의 엄청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단어이다. 많이 안다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던 수 많은 박학다식했던 인간들 중에서, 누가 지혜로운 자의 반열에 올랐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