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탐구에 있어, 창조론적 관점에서의 접근법과 진화론적 관점에서의 접근법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접근법들(이성적인 관점과 감성적인 관점)과는 그 개념부터가 크게 다르다. 개념이 다르다는 것은 이들 접근법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전혀 다른 시야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탐구하겠다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세상만물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에, 신성을 중심에 두고 인간을 탐구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을 탐구하겠다는 것은, 인간은 창조에 의해 홀연히 나타난 존재가 아니라, 억 겹과도 같은 시간 동안의 진화를 거쳐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에 중심을 두겠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법에 대해서는 종교적인 문제가 끼어들기 마련이라 더 이상의 논의는 괜한 논란거리만을 만들어 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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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상기의 접근법 각각에게 작용할 수 있는 공통적인 촉매이다. 또한 철학은 지금의 '우리'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사이에서 떠도는 ‘불완전한 하지만 완전하게 보이기도 하는’ 아주 별스러운 존재로 만들고도 있다.
•형이상학(形而上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의 제목(Aristotle's <Metaphysics>)에서 유래한 용어로써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에 의하여 탐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형이하학(形而下學): 형이상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용어로써, 형체를 갖추고 있는 사물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주로 경험적 대상의 학문인 자연 과학을 이른다.
그 접근법이 어떠하든 간에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탐구를 통해, 일정한 존재로서 유무형의 형상을 갖출 수 있는 하나의 질료가 된다. 인간은 어떤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것이 되는 존재이긴 하지만, 다양한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어느 하나만으로 특정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질료인 것이다.
•질료(質料, substance, matter, material): 질료는 물질의 생성 변화에서 여러 가지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본바탕을 말하는 것으로 형상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것으로 되는 재료를 말하는 철학적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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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라는 대명사가 향하고 있는 궁극에는 '나‘라고 하는, 지독히 이기적인 데다가 변덕조차 심한 한 사람의 미완의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우리라는 개념은 그런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막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이며 어떠한 손놀림으로 다루어지는 것이건 간에 '인간'을 탐구하는 것은 별빛 하나 없는 칠흑의 밤바다를 떠다니는 조각배처럼 방향을 잃고 유영하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온갖 잡스러운 사색과 좀스러운 주장이 끼어들 여지가, 굳이 애를 써서 찾아 나설 필요도 없을 만큼, 길섶에 자라난 잡초들처럼 산재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을 탐구함에 있어 발생하는 이런 망망함과 비결정성은 대개의 경우 ‘인간 자체에 내포된 복잡성과 불완전성’에서 기인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식의 접근을 통해, 어떠한 해석의 과정을 거쳐,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든지 간에, 그 모든 접근과 해석과 결론을 '인간'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냐.”와 같이 가장 일반적으로 부닥뜨리게 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 또한, 그것의 답이라고 주장되고 있는 것들 모두를 답이라고 받아들여도 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전부를 오답이라고 간주해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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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면 그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 것이 '우리라는 인간'에 대한 것이기에 조금은 폭을 좁히려는 시도가 필요해진다.
인간이 ‘관계 속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측면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 - BC 322)가 남겼다는 문장 한 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폴리스적인 존재’라고 얘기함으로써 ‘나’라는 인간의 존재에 있어 ‘우리’라는 개념을 심어놓았다. 개개인에 불과했던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을 통해 폴리스를 구성하는 '우리'라는 전체가 된 것이다.
그리스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영어로 번역한 문장 ‘man is by nature a political animal’(인간은 선천적으로 정치적인 동물이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갔던 시대를 좀 더 살펴봐야 한다.
그가 살아간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리스(Polis)'라는 것이 사회의 구성과 정치의 단위였으며 또한 인간이 문명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시스템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이 폴리스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폴리스란 이데아(Idea)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이, 일상의 삶 속에서 고안하고 마련해 낸 ‘현실에서의 이데아’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