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나 전설이란 것 대게가 그러하듯이,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 또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의 가슴과 감성에 오롯이 자리를 잡을 때에야 비로써 그 유효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가슴은 그 자체만으로 높고도 높은 하늘이며,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산이고, 가없이 넓은 우주이기에 '어떤 것에 대해 유효성을 부여하는 것'에 관한 당위성은, 다만 가슴이 그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 하나이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것이 시사하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것들 중에서 한 가지는, 상당 부분에서 신화의 영역과 겹쳐 보이기는 이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이야기를,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공간으로 어떻게 끌어와야 하나.”라는 것이다.
그 속을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게 되면, 이성적인 것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다.
또한 인간이란, 스스로가 만들어 낸 ‘주관적인 객관’을 최전방에 내세우기 일쑤라서, 자신이 만든 날개를 ‘스스로의 어깻죽지에 달아 붙이는 것’과 같은 비이성적인 환상을 도입하는 것을 그리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존재이다.
사실 이카로스가 달아 붙인 날개는, 자신의 아비이면서 또한 이카로스가 갇혔던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든 장본이자, 이카로스가 그 미궁에 갇히도록 만든 원인의 제공자이기도 한 다이달로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카로스의 날개'에는 시인 이상의 시에서처럼 '날개가 돋아나는 것'과 같은 자의적인 능동성이 더듬어지기보다는 타의적인 수동성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스스로 만들지 못한 날개’를 자신의 몸에 부착해야만 했던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현실에서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적용하기 어려운 것은 이와 같이 비이성적이고 타의에 의한 수동성에서 그 이유의 일정 부분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주인공인 이카로스의 행위적인 수동성과, 이야기 자체가 지닌 비이성적인 면으로 인해 사람들의 뇌리에 더욱 깊게 남겨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들 이카로스에 반해 아비 다이달로스는 미궁 라비린토스와 날개를 직접 만든 장인이면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과 인간의 경계에까지 올랐다고 칭송받는 최고의 현인이다. 따라서 그가 저지른 몇 가지 실수들은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이의 적극성이 빚어낸 부수적인 작용’ 정도로 볼 수도 있다.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제목 상에서는 주연이 아니지만 내용 면에서는 주연으로 여겨지게 되는 아비 다이달로스와, 제목 상에서는 주연임이 분명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주연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카로스의 역할에 대한 고심이 일차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또한 그 뒤를, 이 둘의 관계와 그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지금에 이르러서도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고찰해야만 하는 것인지와 같은 궁금증을 풀기 위한 단초를 찾아 나서는 일이 따르게 된다.
사설이 더 길어지게 전에 이쯤에서 아비와 아들이라는 그 둘 사이를 잇고 있는 진한 혈연적 고리를 잠시 풀어두자. 이카로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행위(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미궁에 갇히는 형벌에 처해진 것이고, 그 형벌의 원인을 제공한 타인의 도움을 통해 날개를 붙여달고 그 미궁을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그 타인은 바로 자신의 친아비이니, 이카로스가 지은 죄는 연좌제로 의해 뒤집어쓴 죄이자, 벗어날 수 없는 일종의 원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카로스의 추락은 그 원죄에 대한 형벌이자 원죄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 이카로스에게는 미궁에 갇히는 일시적인 형벌과 추락을 통한 사망이라는 최종적인 형벌이 가해진 것이고, 아비 다이달로스에게는 미궁에 갇히는 신체적인 형벌과 자신의 아들 이카로스가 추락해서 사망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정신적인 형벌이 가해진 것이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아들을 사망케 만든 다이달로스가 그 사건 이후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 둘 중에 누구에게 가해진 형벌이 더 잔혹한 것인지에 대한 것은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이의 몫이기에, 이 이야기는 고대에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지금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by Dr. Franz Ko(고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