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허술해 보이는 구성과,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 상의 틈새로 인해, 물론 그런 것들 또한 의도된 장치의 일종일 수는 있지만, <이카로스의 날개> 또는 <이카로스의 날개 이야기>로 알려져 있는 이 이야기에 대한 서술은 개개인 간에 큰 편차를 가지기 마련이다. 이야기가 가진 이러한 태생적인 특성이 해석의 분분함을 낳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깊지 못한 지식만을 뒤적거리거나, 감상에 도취된 채로 밤의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더듬거리다가 보면, 이카로스 달았다는 ‘날개’라는 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아주 영험한 신물(神物)이어서 이카로스가 아주 특별한 존재라고 여겨지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사실 이 또한 이야기에 담겨 있는 선인들의 전언(傳言)이기도 해서 ‘오류’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조차 또 다른 오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카로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상의 원인은, 이카로스가 젊디 젊은 사내였다는 것과, 자신에게 허락된 영역보다 더 높은 곳까지 날아오르려 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몸뚱이를 가진 건장하고 잘 생긴 사내놈이 높이 날아 오른 하늘’이 주는 형이상학적인 이미지는 ‘창공’이라는 도전적 메시지로 이어져서 <이카로스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넘어서 더 넓고 높은 창공을 자유로이 날고자 했던 어느 도전적인 젊은이’의 이야기로 확대 해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대해 ‘이카로스의 추락’을 긍정적이지 않은 개념에 연결 짓고 있는 서술에서나, 추락으로 인한 죽음을 통해 ‘사회적인 교훈 찾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서술에서는, 한낱 치기 어린 젊은 사내놈이 자신의 몸뚱이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해 결국 자신과 아비를 비극으로 몰아넣은 것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을 들여다보면 이카로스는, 자신의 아비인 다이달로스가 대변하고 있는 ‘기성세대’ 또는 ‘기득권 세력’과, 하늘이 대변하고 있는 ‘기존 질서’ 또는 ‘사회적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더 큰 것을 탐하는, 이성적이지 못한 충동적인 젊은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적으로 종교가 사회시스템 전반을 지배하던 중세시대에서는 '하늘'은 곧 '신의 영역'이기에, 하늘에 대한 도전은 사회시스템에 대한 도전이었다. 따라서 금지된 영역까지 이카로스가 날아오른 것은 금지된 선악과를 아담과 이브가 취한 것과 같이 아주 불경스러운 일이었으며 이 행위는 곧 또 다른 ‘인간의 원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더 높이 날아오르고 싶다는 욕망은 이브를 유혹한 뱀의 유혹과도 같은 것이다.
신은 죄를 지은 자에게는 반드시 대가를 요구하는 결코 자비롭지 못한 존재이다. 죄의 대가는 형벌이기에, 이카로스가 추락하여 사망한 사건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비극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정의를 구현한 일일 뿐이다. 특히 중세시대에는 이카로스의 추락이 금지된 신성에 도전한 어리석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의 형벌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어쨌든지 간에 좋다. 이카로스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만나게 되고, 어떠한 방향으로 해석의 줄기가 뻗어 나가든, 또한 애초에 이 이야기를 지면으로 옮긴 이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이 이야기는 ‘깊이 생각하는 인간’의 영혼에 스며든 '정신적 비행'의 형이상학적인 소재가 되고 있다. 이제 젊은 사내 이카로스의 비행은 깊이 생각하는 자의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유의 비행이 된다.
비행을 한다는 것이 비록 이카로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추락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는 창공(蒼空)을 날아오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 잡힌 인간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그리고 미래에나, 언제나 존재했었고 존재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창공이라는 단어가 갖은 특별하고 뜨거운 유혹과 강력한 마법 때문일 것이다. 그 마법이 비록 흑마법일지라 해도 인간은 기꺼이 그것에 몸과 마음을 던져 넣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추락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는 비상’을 단지 무모함에 연결 지어 서술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무모하다는 것에 입을 맞추고 있다. 세상을 살만큼 살아보니 그들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카로스의 비상을 무모함이라고 서술하는 주장은 분명 이성의 작용에서 발현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삶을 이성적인 행위와 사고만으로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떻게 그 무미함과 건조함을 견뎌낼 수 있을까. 인간이 과연 이성적이기만 한 존재인가. 눈을 돌려 주변을 들러보면, 인간의 세상이 이성적인 행위와 판단, 사고만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그래서 이성적으로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을까.
이성을 따르지 않는 이가 있다고 해서, 나에게 그리고 사회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비이성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에는 겉으로는 이성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막상은 타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고 있는 인간이 어디 한둘이란 말인가.
또한 그녀 또는 그가 만약 “나는 나의 초이성(超理性)을 따르고 있는 것이야.”라고 논리를 펼쳐가며 말을 한다면, 어떤 이성이 그것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이성이나 비이성(非理性)을 넘어선 초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해야 한단 말인가.
시인 이상의 시 <날개>의 한 토막이, 싱싱한 날것의 한 토막처럼 푸드덕 몸을 튕기고, 마치 익숙해진 유행가의 후렴처럼 입안을 감돌고 있는 것은 초이성의 작용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