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지나온 무엇인가에 연결되어 그것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살아가야만 하는 안쓰러운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지나온 그것들 중에서 어떤 몇몇의 것들은, 인간에 따라서는, ‘추억’이란 아련한 이름의 꼬리표를 부여받는다.
어쩌면 그것들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를 바랐기에, 애초부터 '추억'으로 불리기 위해 생겨난 것은 아닌지 긍금해질 때가 있곤 한다. 또한 추억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억 스스로에 의해 추억화가 진행된 것은 아닌지도 무척 궁금하기도 하다.
어쨌든 인간에게 있어 추억이란, 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여 결국에는 그 열기로 인해 불타 죽을 만큼 아프게 만들거나, 부들부들 몸을 떨며 웅크리게 하여 종국에는 그 차가움으로 인해 얼어 죽을 만큼 시리게 만들고야 마는, 기억을 넘어 마음과 영혼에 빚어놓은, 겨울 밤하늘에 기우뚱 걸려 있는 초승달빛 같이 잔뜩 날을 세운 칼날이자. 새벽 호수에 피어오른 안갯속에서 올려다보는 새벽 별빛 같이 모서리 뭉개어진 희미한 형체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살만큼 살아보니 알 것 같다. 추억이란, 좁은 방안의 벽면 위에 걸어 둔 지나온 날의 색 바랜 꽃다발의 서걱거림이라는 것을.
분명 물기 아직 싱싱했던 어느 날엔가 그곳에 걸어 두었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눈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 하지만 차마 떼어 버릴 수 없었던, 그래서 의도치 않았지만 박제가 되어 버린, 그래야만 했던 어떤 형편이 그 언제 적부터인가 있었겠지만 애써 지워버려야만 했던, 망각의 늪을 허우적거리면서 어떻게든 색과 향을 입히려 했던, 늘 그 자리에 있어왔지만 때늦게 다시 찾아보게 된, 뒤늦어졌기에 더욱 먹먹해지고야 만, 탈색과 변색을 거친 후에야 받아들일 만 해진, 좁은 방안의 허공에야 겨우 뿌리내린 채로 말라버린, 행여 작은 움직임에도 부서져 내릴 듯이 아스라한 꽃과 꽃의 뭉치가 바로 추억과 추억들이란 것을 지금에 와서야 조금 알아차리게 되었다.
어떤 추억은 인간에게 가해진 형벌일 수 있다. 추억이 정당한 형벌이라면 추억을 지닌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인간은 피해자일 수 있다. 혹시라도 그렇다면 인간이 지은 죄는 무엇이고 그 판결을 누가 내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