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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의 미학, 단테의 <신곡>

트라우마의 미학, 단테의 <신곡>

     

큰 신뢰에는 큰 좌절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르기 마련이다. 피렌체에서 만난 단테는 단지 <신곡>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단테의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 <신곡>에는 '트라우마'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 베아트리체의 외면은, 비록 그것이 단테의 짝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결국에는 단테에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는 단테의 상대적 열등감에서 발원한 배신감이 원인이었다. 

그 배신감은 지체 높은 베아트리체의 집안과 그렇지 못한 자신의 단테의 집안 사이를 벌려 놓은 신분의 격차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배신감과, 어여쁜 그녀와 못생긴 자신이라는 신체적 배신감과 같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태생적인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배신감의 가장 큰 원인은 '자기 자신'이지만 '그것 때문' 또는 '누구 때문"이라는 변명의 대상을 물색하는 것이 인간이다. 

단테는 그것을 '베아트리체 때문' 그리고 나아가 '사회 때문'으로 돌렸고 종국에는 그것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실패한 사랑이 트라우마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사랑은 지극히 통속이다. 그것이 혼자만의 짝사랑에 불과할지라도 사랑은 커다란 신뢰를 상대에게 쏟아 붙게 만들고 결국에는 더 크게 좌절하게 만드는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행위이다.  


<신곡>을 읽다가 보면 배신감이 발현시킨 단테의 트라우마가 똬리를 틀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신곡>을 읽고 또 읽게 되는 것은, 이성의 유리면을 닦고 들여다보면 한낱 얼토당토 안 한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트라우마가 또한 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꾹꾹 눌러 두었던 트라우마를 만나는 것은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카타르시스의 언덕을 오르게 만드는 ‘아픈 쾌락’의 행위이다. 


인간은 지극히 비이성적인 통속의 존재이다. 단테 또한 지극히 비이성적인 통속의 존재였다. 그래서 단테의 트라우마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일 수 있다.  

인간의 트라우마는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그리고 사회적 관계로부터 만들어진다. 트라우마에 있어 ‘나’라는 존재는 분명 나이긴 하지만 내가 아닌 타인일 수도 있다. 어떤 나는 나의 페르소나이며 나에게 트라우마를 새겨 넣는 존재이다. 단테의 영혼에 새겨진 가장 큰 트라우마는 ‘버림받음’ 또는 ‘외면당함’에서 온 배신감이다.     


단테의 <신곡>은,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여인 베아트리체를 그리워하며 쓴 작품이다. 비록 짝사랑이었지만 단테의 가슴과 몸을 들끓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베아트리체를 찾아가면서 겪는 일들이 <신곡>의 줄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베아트리체가 죽은 후에 쓰였으니 배경은 당연히 이 세상이 아닐 수밖에 없다. 단테의 첫 작품인 <신곡>에는 그의 환상과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알려진 것과 같이 단테는 베아트리체에게서 두 번의 상처를 받는다. 두 번의 외면이 그 상처의 원인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테의 일방적인 행위로 인한 것이다. 사실 베아트리체로서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 수 있다. 인지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녀는 ‘죄’를 짓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그녀의 행위는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비록 '버린 자'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 해도 '버림받은 자'는 전혀 다른 입장에 처하게 된다.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배신’이라는 파괴적인 단어에 결부된다. 이 단어는 상호 인지가 되지 않았던 것에게조차 ‘약속’이란 단어로 옭아매고 종국에는 ‘약속을 저버린’ 것에 대해 배신감을 발현시킨다. 이제 그 배신감은 ‘버림 당한 자’에게 치명적인 상처와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그 상처는 치유될 수 없는 것이기에 용서될 수도 없다.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버린 자를 넘어 ‘배신한 자’이며 트라우마의 근원이다. 하지만 단테가 휘두르는 복수의 칼날은 그녀에게로 향하지 않는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배신자의 방’을 설치한다.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향하지 않은 칼날은 타인에게 향하고 있다. 그 타인에는 단테 자신과 나, 우리가 포함된다.

 

여기에서 <이솝우화>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위대한 문학작품인 단테의 <신곡>에 <이솝우화> 몇 방울을 떨어뜨려 희석하는 것을 불경스러운 짓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단테의 <신곡>은 우화 같은 이야기다." 사랑했던 여자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려진 단테와 그 통속적인 이야기에 뿌리를 내린 문학작품이 <신곡>이라니, <신곡>은 버려짐과 배신이 가진 통속의 미학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버려짐과 배신이 새겨놓은 트라우마 또한 통속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트라우마는 우화이며 통속이고 또한 미학이라 여기며 살아간다면, 살다는 것이 것이 좀 더 평안한 일이 될 수 있을까. 


by Dr. Franz Ko(고일석)@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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