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이 무디어져 가고 있는 것일까. 계절의 다가섬이나 떠나감에서 아무런 기척을 못 느끼는 때가 생겨나고 있다. 그럴 때가 되면, 들판의 이름 없는 꽃들이 때 없이 피어나고 스러져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듯이, 언제인지 모르게 슬쩍 왔다가는 슬며시 떠나버리는 것이 계절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안개 낀 낮 빛을 미간 찡그리며 바라보다가 백목련 그늘 아래를 찾는다. 이곳에서는 시간과 사랑이 때와 방향을 잃고 중첩된다. 이유는 몰라도 좋다. 안개가 산란시킨 낮 빛과 언제 적인지 기억 아련한 어느 해 봄의 백목련, 이 둘 사이에는 어떤 인연 몇 가닥이 엮여있어도 좋고 아니어도 그만일 뿐이다.
나의 시계는 연도라는 숫자를 잃은 채 화사한 봄빛이 천지간에 만개한 어느 봄날의 한 순간, 솜뭉치 같은 목련꽃이 주렁주렁 매달린 키 큰 나무 아래로 기어든다.
여름, 가을과 겨울의 시간을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던 목련나무는 긴 기다림의 시간 끝에 이른 봄, 화사한 꽃 장식으로 스스로를 맘껏 꾸미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문득 관심 밖으로 뚝 떨어져 나가야만 하는 안쓰러운 미소가 목련꽃의 미소에 녹아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내 년과 또 그다음의 내 년을, 그 짧은 절정의 시간을 위해 그렇게 영겁 같은 시간을 시지프스가 영겁의 돌을 굴려 산을 오르듯 돌고 돌아가며 기다리는 것이 목련에게 주어진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생각해 보니 새색시의 진주빛 느낌이란 게 활짝 물오른 백목련 같다. 그 투명하고 화사한 뽀얀 밝음으로 새색시를 치장하는 것이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봄이 깊어간다. 목련을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목련의 잎은 꽃을 떠나보내지 않으려 부여잡으려는 것 같지만 가지는 꽃잎을 아무렇게나 떨어내 버려야만 비로소 나무로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궁금하다, 목련에게 삶이란 건 꽃인 걸까 나무인 걸까. 꽃이라고 하기엔 목련의 삶이 너무 짧기만 하고 나무라고 하자니 혹시 꽃을 그저 쉬이 여기 게 될 것 같아서 크게 아쉬움이 남게 된다.
오늘은 백목련의 이름을 ‘하늘 봄빛을 닮고, 물 빛 진득이 머금은 가지에 솟아난, 뽀얀 그리움의 꽃’이라 하고 싶다. 돌이켜보면 사랑할 수 있었고 그리워할 수 있었던 때가, 그 아련하고 먹먹한 시간이, 삶에서의 최고의 순간이었다.
사랑과 시간은 하나이다. 사랑에게서 시간을 떼어낸다면, 시간에게서 사랑을 지운다면, 삶은 허공에 손가락으로 그려 넣은 언약 한 문장처럼 공허해질 뿐이다.
아프다고 해도, 비록 그 사랑으로 인해 지워버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봄날 같은 그 시간에, 인생의 절정의 시간에, 사랑할 수 있었기에 그것은 가장 아름다움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래서 땅에 떨어질 운명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지금의 화사함을 맘껏 누리려는 백목련의 삶이 아름다운 게다.
너무 빠른 개화와 처연한 낙화를 생각해 보면 목련의 진실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의 희생과, 한 곳만 바라보는 목련의 애절함에서 가슴 뭉클해지는 연민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의구심을 지울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 절정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그 시간을 잊어버린 채로, 나날이 시들어만 가고 있는 무기력증이 백목련을 시기하는 것일 수 있다.
유령 같은 관념들이 흔한 상징의 껍질이 되어 바닥을 뒹군다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무거워진 몸뚱이가 부담스러워, 짙은 점박이 박힌 진주 빛 코트를 봄바람 풀풀 부는 탈수기에 넣어 돌려내니 구겨진 마른 검흑색의 종잇조각처럼 기억이 가벼워진다
바닥에 눕는다 그 끝은 날카롭지만 부드럽다 얼마만인가 온전한 봄빛을 가슴에 안아본 것이
마른 각질이 툭툭 터져 떨어져 나가는 등이 가렵다
온몸 가득 물기 축축한 시간에게 이 봄을 맡겨도 좋겠다 행여 눅눅해지는 일이 있다 해도 상관없다
이제 그 시간이다 떠나야 할 때인지 돌아갈 때인지는 모르지만 무거워진 몸뚱이를 때맞춘 자위로 한 움큼 들어낸다
이제 이야기를 마치야 할 또 다른 시간이다. 마음에 담아 두었던, 망막에 가두어 두었던 사랑과 시간의 추억을, 백목련의 화사함이 담겨 있는 사색을, 이른 봄의 백목련에서 느꼈던 아스라한 그 무엇인가를, 이 몇 줄 문장에 엮어내려는 짓은 어리석은 시도일 수 있다.
변명은 지나간 사랑과 시간을 위안하기 위한 인간적인 장치이다. 그때는 몰랐던 것을 이제 와서 알려고 해 봐도 그저 소용없는 몸짓이 될 뿐이란 것을 안다. 제대로 모르고 어딘가 부족하고 여러 구석에서 어색해도 좋다. 언젠가 마음 대고 손끝대어 몇 자 수정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또 다른 감상을 덧칠한들 목련에 대한 감상은 그리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