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 바람이 불어온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람의 향기가 그리운 날이다.
싸늘한 빗물이 눈이며 뺨을 적신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냥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지난 계절이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고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비가 내리는 날에도 그렇지 않은 날처럼 외로움은 떠나질 않는다.
외롭고 쓸쓸해질 때면 고독이 밀려온다.
그래도 젖은 눈을 누군가 알아차릴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다.
행여 날조차 맑았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치적치적 고인 빗물이 낡은 돌틈 사이로 스며든다.
비 오는 날에는 성전을 바라보는 것조차 물기 먹은 발걸음처럼 무거워진다.
빗물에 젖은 성전의 화려함은 이방인의 짙은 고독만큼이나 음울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피렌체를 쌓아 올린 사람들은 자신의 고독을 성전의 화려함으로 희석시키려 했던 것 같다.
플로렌스라는 화사한 이름을 붙인 것도 그래서일 수 있다.
태초에는 화려하다는 것이 고독하다든가 쓸쓸하고 외롭다는 것을 의미했을 수 있겠다.
마치 혼자만이 남겨진 듯 허전한 느낌은 태초의 고독과 외로움에서 발원하는 것일 게다.
영혼이 허전한 것은 인간의 지병이다.
인간이기에 영혼이 허전한 것이고 영혼이 허전하기에 인간인 것이다.
성전을 밝히는 불빛은 눈이 시릴만큼이나 아름답게 밝다.
깜빡 정신을 놓는다면 눈이 멀어버릴 수도 있다.
성전의 화려함으로도 영혼의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는다.
행여 채웠다고 믿더라도 다시 허전해질 뿐이다.
허전하기에 화려함을 쫓고 화려하기에 허전해지는 것은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도는 것과 같이 끊을 수 없이 반복되는 재귀적인 현상이다.
이성적인 인간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영혼이 허전해질 것을 알면서도 화려한 것을 쫓아 헤매는 것은 시지프스(Sisyphos, 시시포스)가 돌이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정상을 향해 돌을 굴리는 것처럼 인간에게 내려진 형기 없는 형벌일 수 있다.
르네상스의 발원지 피렌체의 돌바닥을 걸어 다닌다.
오직 신만을 바라보던 인간이 신성만으로는 채울 수 없었던 영혼의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자신에게로 눈을 돌린 것에서 르네상스가 발원했을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인간의 쓸쓸함과 고독에서 길어 올려졌을 것이다.
견고한 돌덩어리를 쌓아 올린 이 화려한 성전도 인간의 이성 위에서 존재하고 있다.
이성이란 것이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란 뜻 또한 가지고 있으니 성전이 경외롭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신을 찬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의 신전처럼 피렌체의 성전도 피조물인 인간의 숭배를 통해서야 실제하는 성스러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그곳에 있기에 신이 그곳에 있는 것일 수 있고, 신이 그곳에 있기에 인간이 그곳에 있는 것일 수 있다.
그곳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인간 또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이 성스럽다는 것은 인간 또한 성스럽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전은 성스럽기에 아름다운 곳이고 화려하지만 사람을 위축되게 만들지는 않는 곳이다.
수많은 성전들이 이젠 신을 경배하기 위해 사용되기보다는 박물관이나 기념관,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영원할 것만 같았던 피렌체인의 염원은 그리 길지 못했던 것 같다.
성전을 쌓아 올리고 신을 숭배했지만 신도 인간도 언젠가 성전을 떠나버렸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신이 떠났기 때문에 인간이 떠난 것일까, 인간이 떠났기 때문에 신이 떠난 것일까.
관광객의 분주한 발길과 눈빛, 플래시의 반짝임만이 성전의 일상이 되었으니 이젠 더 이상 성전이라 불러서는 안 될 것 같다.
신과 인간이 떠나간 성전에서 고독은 서쪽하늘 끝에 내려앉은 늦은 오후의 햇살처럼 잔뜩 짙어져 간다.
- 뉴욕의 봄을 기다리며,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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