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고 그중에서도 그림을 특별히 잘 그렸다.
성적표에 박혀 있는 최고 점수의 과목은 언제나 미술과 음악이었고 그림 그리는 것과 음악에 대한 이해는 반에서 뿐만이 아니라 학교 전체에서도 최고였다.
가정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기에 풍금이나 현악기, 관악기와 같이 제대로 된 악기를 연주할 수는 없었지만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입한 플라스틱 피리를 악기랍시고 불고 다녔다.
아이가 피리를 부는 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들판을 돌아다니는 날에도, 또는 학교 운동장에서 해지기를 기다리는 날에도 아이의 피리에서는 음악 시간에 배운 곡들이 삑삑 쉰 목청을 돋우곤 했다.
그 모습을 보았더라면 분명 '피리 부는 아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어느 날 귀티 나게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전교생이 지켜보는 [아침조회] 자리에서 [아코디언]이란 생소한 악기를 연주하였고, 교단 아래에 차려자세로 서서 그것을 우러러보던 또래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아이의 입은 피리와 멀어졌다.
먼 친척이었던 그 여자아이가 음악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소질 또한 없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고, 말이 좋아서 연주이지 겨우 시늉만을 내는 정도였는데도 선생님들의 진심 어린 박수가 터져 나왔으며, 그 짧은 곡조차도 그 여자아이 혼자서 익힌 게 아니라 개인교습을 받은 것이라는 것과, 그 여자아이가 메고 있던 반짝이는 아코디언은 감히 만져볼 수 없을 만큼이나 비싼 것이라고 주변에서 쑥덕거렸으며, 거기에 그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우리 학교의 육성회회장이라는 사실이 그날 아이의 가슴에 더해지면서, '자제분'이라고 불리는 부잣집 아이나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아이와 같은 집안형편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잡혀 그날 이후 아주 긴 세월 동안 음악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제 아이에게 남은 것은 '그림 그리는 것'뿐이지만 그것 또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여섯 살 차이 나는 누나가 사용했던 모서리 까진 낡은 화판과, 이빨이 빠진 것 같이 들쑥날쑥 비어 있는 크레용 한 세트가 아이의 집에 있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두 살 아래의 남동생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심지어 미술 수업이 있는 날에도 남동생의 사정 여하에 따라 아이의 손에는 크레용과 화판이 들려 있지 않았다.
준비물을 준비해 갈 수 없었던 그런 날이면 아이는 오직 필기용 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며 미술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미술용 4B 연필 따위는 사치였기에 잘 나오지 않은 필기용 연필의 심에 침을 듬뿍 묻혀가며 도화지를 채우고 또 채웠다.
흔히들 연필심을 두고 '검은색'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은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 시절에 필기용 연필로만 그림을 그려봤다면 잿빛에 가까운 조금 짙은 회색이라는 것과, 침이 묻어야만 조금 더 검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학교 안과 밖에서 미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선생님의 출전 권유가 있었지만 아이는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남동생이 하나밖에 없는 화판과 크레용을 갖고서는 '꼬박꼬박' 미술대회에 출전했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한 달 치 육성회비와 맞먹는 대회참가비 또한 아마도 아이의 출전 기회를 막아서는 높은 장벽이었을 것이다.
가작이라든가 특선과 같은 높지 않은 수준의 상이었지만 간혹 상이란 것을 받아오던 남동생은 이후 우여곡절 끝에 미술대학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그는 결국에는 미술과는 관련 없는 일을 하면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컴퓨터와 경영학을 생계의 기반으로 삼던 아이는 언젠가부터 미술사학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인간의 삶은 신(God)이나 외적 여건 같은 것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내적 의지와 그것을 버텨낸 시간을 따르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후일의 어느 날엔가 어른이 된 아이가 말했다.
아무튼 당시의 아이는 동생이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아 오는 날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아이가 받을 마음의 상처 따위는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아비와 어미와 누나들이 싫었고, 장남이지만 장남으로 간주되지 않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싫어했다.
그럴 때면 셋째이자 장남과, 넷째이자 막내아들은 원래부터 씨가 다른 것이 아닐까, 의혹을 눈초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장남이란 의무만이 짓누르는 무거운 자리이고, 무엇이든 양보해야만 하는 차디찬 자리였으며, 모든 것을 참아야만 하는 잔인한 자리이고, 누구보다 남자다워야만 하는 천형의 자리일 뿐이었다.
아직 어렸지만 또래의 아이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였기에 주변 어른들은 아이를 ‘애-어른’ 같다고 불렀다.
하지만 어른 같은 아이란 있을 수 없기에 '애-어른'이란 말은 결코 칭찬일 수 없었다.
아이란 당장에는 어른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이는 아이일 뿐이고 그래서 아이가 아이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정형편이라는 살아가는 상황으로 인해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조금 더 성숙하게 말하고 행동해야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빠진,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그래서 또래의 아이들보다 조금은 어른 같아 보일 수도 있는 안쓰러운 아이가 '애-어른'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알아야만 한다, 행여라도 ‘애-어른’이라고 불리는 아이가 혹시라도 주변에 있다면 그 아이의 가슴에는 필시 무수한 생채기가 새겨지고 있다는 것을.
혹시 그런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어른-아이'가 아니었든가, 스스로를 돌이켜 봐야 한다.
어쨌든 아이는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을, 어쩌면 꼭 그런 형편인 것만은 아니었지만 오직 아이에게만 그랬을 수도 있는 형편을, 가슴으로만 탓하면서도 입이나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을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언젠가부터 느꼈지만 그것을 탓하는 것은 한낱 어리석은 짓일 뿐이란 걸 아이는 어떻게든 알게 되었다.
세상을 아무리 탓하더라도 세상이 바뀌는 일 따위는 없는 것처럼 아무리 가족들을 탓한다고 해도 그들 또한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걸, 어떤 것은 체념해야만 탓하지 않게 된다는 걸, 그 시절의 아이는 비록 어렸지만 이미 깨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