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가난하고 젊은 작가들을 위한 ‘작가 정신의 증언록’이다.
이 책에서 헤밍웨이는 젊음과 곤궁함, 글쓰기가 어떤 방식으로 융합되고 어떻게 표출되면서 작가 정신으로 수렴되는지를 그의 절제된 문장으로 증언하고 있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 속의 파리는 낭만적인 거주지로나 아름다운 관광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
난방이 안 되는 허름한 방에서 잠을 자고 값싼 카페에서 와인을 마시며,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글쓰기에 몰두하는 공간, 시간의 흐름조차 굴절을 일으킨 것 같은 ‘무언가에 갇혀버린 공간’이지만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주술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부리는 것이 헤밍웨이의 파리이다.
그래서 파리에서는 축제조차도, 장소와 시간 따위를 가리지 않고 마치 저잣거리 좌판 위에 늘어놓은 소품들만큼이나 흔하게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헤밍웨이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의 텍스트를 통해서 ‘젊은 날의 궁핍’을 낭만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배가 부르면 문장이 흐려진다.”라든가, “결핍은 문장을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와 같은 자기 고백적인 회상을 통해 ‘젊은 날의 궁핍이 작가정신의 집중과 절제의 조건’이었을 수 있다고, 은유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의 핵심적인 은유는 ‘Movable Feast’라는 제목 그 자체에 있다.
박제되어 특정한 장소나 어느 한 때의 시간에 고정되지 않는 ‘기억과 정신계를 부유하는 파리’가 바로 <파리는 날마다 축제>의 핵심적인 은유이다.
그래서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의 텍스트들을 훑다 보면 '은유의 축제'에 빠져 시간 가는 것을 잊게 될 수 있다.
분명 파리는 지리적 공간에 붙여진 지명이지만 헤밍웨이의 파리는 단지 ‘특정 공간에 붙여진 지명’으로서만 실체 하는 것이 아니기에 파리는 더 이상 지나간 어느 한 시절에 그곳에 있었던 고정되어 불변하는 도시가 아니게 된다.
젊은 시절의 한 때라도 진심을 다해 그곳에서 살아본 사람에게 파리는 물리적인 감각과 정신적인 내면으로 존재하면서 평생토록 곁을 지키는 ‘비실체적인 실체’가 된다.
따라서 파리는 고정된 장소로서의 공간과, 멈춰버린 흐름으로서의 시간을 거부하는 '부유하는 추상의 도시'이면서, 박제되어 기억의 벽면에 걸려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강력하게 부정하는, 그래서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현재에도 살아서 움직이는 Movable City로 실체 하는 것이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헤밍웨이는, 파리는 그때의 시간이 이미 끝나버린 물리적인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에서뿐만이 아니라 지난 시간의 삶 속에서도 장소와 시간의 제약 없이 실체를 가질 수 있는, 기억에서 소환될 때마다 비슷하긴 하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은, ‘영혼에 깃들어 있는 도시’라는 주문을 속삭이듯 외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헤밍웨이의 파리는 <A Movable Feast>이란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을 너머, 어느 때의 어디 곳으로든지 ‘Movable'한 정신적 실체이다.
헤밍웨이의 텍스트들을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Movable Feast>를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이것에는 ‘파리는 곧 낭만’이라는 파리에 대한 선입견이 막연하지만 커다랗게 <Movable Feast>의 번역에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제와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사람은 원래, 듣고 싶은 것만을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자신의 주관을 객관이라고 우기고, 보고 싶은 것만을 실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지극히 이기적이면서도 지극히 이성적이기도 한 존재'이다.
'일반화의 함정‘에 빠진다고 해서, 대개의 경우에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에서 크게 실족당할 일은 없게 된다.
우리가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는 문장 또한 그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읊조려 보면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니, 얼마나 낭만적인 문장인가.
물론 헤밍웨이가 <Movable Feast>에 채워 넣은 텍스트들을 제대로 읽어 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