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을 향해 곧게 선 유리창에 빗물이 맺혀 흐르고 있다. 투명한 물방울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어딘가 어색하긴 하지만 그 형상이 마치 원래의 제 모습이었든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길거리 군상의 움직임조차 구분하기 싫어지는 이른 아침의 시간이 하구에 다다른 강물처럼 느릿하게 흘러간다. 분명한 선명함보다는 둥그런 왜곡이 아침의 심사를 편하게 만든다.
창에 부딪힌 빗방울은 한쪽 면이 잘려나간 구슬처럼 유리의 면에 달라붙는다. 옅은 갈색의 홍차를 말갛게 우려내다가 뽀얀 수증기의 승천을 따라 수미산의 산길을 오른다. 굽이굽이 한참을 걸어 오르다가 정상에 이른다.
“여기가 선견성인가 보다.”
머리를 두리번거리기도 전에 혼잣말이 새어 나온다.
머리 위를 덮고 있는 무수한 구슬을 바라보던 눈길에 먼지 낀 생각들이 걸려 나온다. “인드라망(산스크리트로 인드라얄라(indrjala))이라 불리는 인드라의 그물은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언젠가 지나던 바람이 얘기해준 것 같다.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인간의 세상’과 ‘만물의 세상’을 포괄적으로 통칭하는 것이다.
고대 인도의 신화에 따르면 수미산의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중앙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에 속한 천신(天神)들의 왕인 인드라(한국말로는 제석천)가 신이 사는 궁전인 선견성(善見城)이 있다. 그 궁전의 위에는 인드라망이라는 그물이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그것의 그물코마다에는 보배 구슬이 무수히 달려 있어서 거기에서 나오는 빛들이 서로 겹치고 겹쳐 비추면서 신비한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 구슬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느 한 구슬은 다른 모든 구슬을 비추고 있고 또한 그 구슬은 다른 모든 구슬에 비치고 있다. 어느 한 구슬에 비친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다시 다른 모든 구슬에 거듭 비치는 끊임없는 관계가 마주한 두 개의 거울에 비친 서로의 모습처럼 거듭해서 끊임없이 펼쳐진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구슬에 변화가 생기게 되면 인드라의 그물 전체에 있는 다른 모든 구슬들에 비친 그 구슬의 모습이 변하게 되어 하나의 변화가 곧 전체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물코에 달려 있는 하나의 구슬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드라망의 관점으로 본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연의 고리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개체가 되는 것이다.
인드라의 그물을 통해 세상 만물의 존재 방식을 설명할 수 있으며 ‘모든 존재는 서로 간의 작용을 통해서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은 수미산을 내려온 이 인드라의 그물에 온갖 상상과 억측을 불어넣고 있지만 그 본연은 세상 전체를 끝없이 덮은 가없이 넓은 인연의 그물이란 것이다. 인드라의 그물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무수히 많은 구슬이 인간 세상의 모습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드라망은 끊임없이 서로 연결되어 온 세상으로 퍼지는 법의 세계 즉, 부처가 온 세상 구석구석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개체는 인드라의 그물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추도록 연결됨으로써 존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인연이라는 것 또한 인드라의 그물을 구성하고 있는 개체로써 그물을 벗어나지 않을 때 비로써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연이라는 실체 하지 않는 관념적 현상은 이제 ‘비추상적인 개체’가 되어 하나의 ‘관념적 존재’가 된다.
오만함을 내재한 채 태어난 우리라는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재적 가치를 부여받은 것이라고, 그래서 존재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 우리나는 실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이기도 한 인간이다. 길지 않은, 그렇다고 짧지만도 않은 인간의 삶을 살아가면서 ‘분명 그러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나는 그물의 일부이고 나의 구슬은 누군가 또는 어떤 개체를 비춤으로써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갖게 된다. 또한 무수한 인연의 고리 속에서 그들 또는 그녀들 또는 그것들과 연결되어 있는 개체들이 나를 비추고 있을 때 나는 비로써 존재한다고 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의 관점만을 부각한다면 인연은 개체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핵심적인 작용이다. 그렇다면 그 속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고 때로는 그 내면까지 비추어 주었던 인연이, 지나온 어느 날인가에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분명 나의 구슬 또한 어떠한 형태로든 달려 있을 텐데 나라는 구슬은 어디쯤에 자리를 잡고 있을까.
나의 구슬은 절대적인 것일까, 상대적인 것일까. 영원히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것일까, 상황에 따라서는 이동이 가능한 것일까. 그 크기는 어떠할까. 다른 구슬과 같은 크기일까 혹시 더 작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장할 수 있는 것일까. 반짝이고 있을까 아니면 빛을 잃어가고 있을까. 생각이 생각에 무수히 엉켜 방향 없이 번져 간다.
존재한다는 것이 단지 그곳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속한다는 것을 포함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물에 걸려 있는 개체들은 나와 나의 주변에 존재했었고 또한 존재하고 있는, 내가 인지하여왔고 인지하고 있는 그 무엇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있다는 것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는 또 다른 질문의 초입을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면 빛이 흐려진 나의 구슬을 어떻게 닦을 수 있을까. 닦지 못한다면 다른 구슬로 교체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언젠가 나라는 개체가 비로써 존재할 수 있게 될 때, 나라는 새로운 구슬 하나를 더할 수 있을까. 질문의 꼬리는 논리의 공간을 넘어 초논리의 공간으로 길게 늘어진다.
유리창에 맺혔던 빗물 방울이 중력의 힘을 따라서 쭈르륵 흘러내린다. 산을 내려가야겠다. 내려둔 아침 차의 향이 가야 할 길을 안내한다. 살짝 갈변되어 가는 차색을 보며 인간 세상의 시간 흐름을 가늠한다. 아침 차의 남은 온기에 존재의 욕심은 번민의 찌꺼기가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어차피 빈손으로 올라갔으니 빈손으로 그 길을 되돌아 내려온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온 인간 세상의 초입, 작은 오두막집 굴뚝에서 아침밥 짓는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오른다.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걸음을 멈추어 선다. 붉고 초록의 둥근 방울들이 가느다란 가지마다 달려 있다. 내가 사는 이곳이 둥글고 작은 하나의 세계이듯 방울토마토가 달려있는 저곳 또한 어느 인드라의 그물인가 보다.
새벽의 호흡을 한 가득 머금은
뒷마당의 작은 텃밭에
방울토마토의 향을 가둔
기억의 둥근 포말이
선잠 갓 깨어난 무거운 바람에
얼기설기 맺혀있다
부르르 몸을 떨어 털어낸
간밤의 농익은 내음이
천지 곳곳을 하나로 연결한다
둥근 방울들은
굵게 박힌 뿌리에서
땅을 뚫고 하나로 자라나서
큰 줄기를 타고 구불구불 오르다가
하늘을 향해 제 각각 갈라져
가지마다 이슬처럼 자라나니,
둥근 모양은 닮았지만 어딘가 다르고
붉거나 파란 표피의 미소조차
어느 것 하나 구분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향기를 일일이 헤아려 맡기에는
미세하지 못한 코의 기능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눈을 열어 보고 손끝으로 만지는 것이
코의 허술한 신경보단 앞서기에
덜 깨어난 눈에 떨리는 손끝으로나마
가볍게 톡톡 비비니
새벽안개의 진청색 그늘에서
무수한 둥근 방울이 얼굴을 반짝인다
하나마다가 다른 세계이고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니
저 작은 텃밭에서 나고 자라난
방울토마토의 삶에도
인드라의 그물이 한없이 펼쳐져 있나 보다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