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소리를 내며 활주로 위를 달리던 비행기가 육중한 몸을 서서히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비행기 날개 뒷쪽이 바람의 저항에 맞서 들썩이고 있었다. 인천에서 출발하는 이 비행기는 이제 14시간 후면 뉴욕 JFK 공항에 도착한다. 운 좋게도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안타깝게도 저 건너편에선 머리를 레게로 곱게 딴 흑인 아기가 울고 있다. 제대로 잘 수 있으려나. 건듯하면 밤을 새워가며 장편 소설 연재에만 몰두했던 지난 몇 달을 잠시나마 보충해볼까 싶었건만, 눈을 붙이기엔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
웹진에 마지막 회차 원고를 넘기기로 한 시간은 속절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감까지 딱 일주일뿐 남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뉴욕행이라니. 담당 편집자가 알면 당장 따져 물을 것이다. 연기한 게 벌써 4번째였다. 이번엔 반드시 마감일을 지켜야 했다. 미룬다고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보장도 없었거니와 나는 그렇게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줄 만한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제 마일스의 메일을 보자마자, 나는 뭔가에 홀린 듯 곧바로 뉴욕행 티켓을 끊고 말았다.
“길영,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버드랜드에 나가고 있어.”
8년 만의 연락이었다. 내가 그에게 보냈던 숱한 메일에 대한 답신은 아니었다. 연락을 언제 받은 적이나 있냐는 듯 작성한 메일이었다. 그것도 딱 세 문장으로. 길영, 잘 지내고 있지?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버드랜드에 나가고 있어. 네가 행복하길 바래…….
정말 마일스다운 연락이군. 그나저나 마일스가 버드랜드에 나간다니! 내 친구 마일스 밀러가 마침내 마일스 데이비스처럼 진짜 훌륭한 트럼페터가 된 것일까. 버드랜드는 전설적인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의 애칭(Bird)을 따서 지은, 파커의 오픈 공연과 함께 지난 수십 년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들이 공연해온 재즈 클럽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그곳은 마일스 데이비스에게 큰 일이 있었던 곳 아닌가.
나는 마일스가 뉴욕의 수많은 재즈 클럽 중 왜 하필 버드랜드로 갔는지 의아했다. 그가 멋진 재기를 꿈꿨다면 결코 그곳으론 가지 않았을 텐데. 게다가 정말 제대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면, 트럼펫 자체를 손에서 떼는 게 좋았을 텐데. 설마 마일스는 아직도 미연 씨를 잊지 못한 걸까…….
어쨌든 그가 다시 연락해주어 고마웠다. 나는 그에게 답장하는 대신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일단 일주일에 3번씩 버드랜드로 나간다고 했으니 죽치고 그 주변을 배회하면 볼 수 있겠지.
눈을 감았지만 영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급작스러운 출발이었다. 하지만 나는 떠나야만 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가야 한다고, 당장 가서 그를 만나야 한다고.
기류가 불안정한지 비행기가 연신 흔들렸다. 아기는 더 큰 소리로 울어댔고, 아기를 안고 있던 거구의 흑인 부부는 자꾸 자리에서 앉았다 일어서고 복도를 왔다갔다 했다. 실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렸다.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독버섯처럼 피어올랐다. 막상 갔는데 마일스를 못 만나면 어떡하지. 마감을 제때 못 하게 되면? 이대로 돈도 잃고, 신뢰도 잃고, 작가로서 영영 재기하지 못하면 어쩌지…….
나는 노트북을 가방에서 꺼냈다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좌석 밑에 도로 처박아 두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마일스를 처음 만났던 날도 내 마음 상태가 꼭 이랬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울고 싶던 나날. 하지만 나와 달리 마일스는 한없이 점잖고 근사해 보였다. 물론 나중엔 그의 맘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