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ack 02. 첫 만남

by 연지


마일스를 처음 만났던 날은 러닝을 시작한 지 정확히 29일째 되던 날,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어느 한여름 밤이었다.

러닝 앱에 저장된 기록에 따르면 나는 지난 4주 동안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장대비가 내렸던 나흘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뛰고 있었다. 서촌에 살면 좋은 점은 경복궁 담벼락 둘레길을 러닝 코스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경복궁 돌담길을 한 바퀴 도는 데엔 대략 25분이 걸렸다. 천천히 걸으면 30분이 조금 넘고, 중간중간 뛰면 25분이 채 안 걸렸다. 러닝 앱이 해주는 계산에 따르면 그렇게 움직였을 때 총 거리는 3.2km 내외였으며, 이 숫자는 매일 미세하게 바뀌었다. 조금 더 뛰고 싶어 반 바퀴를 더 돌면 가끔 4km가 넘을 때도 있었고, 가끔 뛰는 것이 힘들어 근처 편의점에 들러 맥주 캔을 사들고 집에 돌아가는 날이면 2.7km 즈음에 그칠 때도 있었다.

평소 운동이라곤 취미에 없었던 내가 무작정 뛰기 시작한 것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갑작스레 심장이 두근거리고, 자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러닝 초반에는 심리상담과 운동을 병행해야 할 정도였다.

마흔을 막 넘기던 그 시기, 나의 삶은 깊은 혼란과 불안 속에서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사랑도, 일도 뭐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는 나날이었다. 나의 습작 소설은 공모전에서 매번 탈락했으며, 겨우 취업해 한참 잘 다니고 있던 종합음반사에서는 돌연 재정 위기를 선포하며 내가 속해 있던 단행본 편집팀을 다음달 해체하겠노라 선언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P와의 관계는 점점 끝이 보이고 있었다.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나의 오랜 연인 P는 이직과 동시에 삶의 새로운 챕터를 준비 중이었다. 나는 그의 삶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불안할 때마다 연락에 더욱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그가 내 모든 연락을 차단해버렸을 때,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두렵고 막막했다. 앞으로 남은 삶을 대체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이 모든 상황은 젊은 날 내가 꿈꾸었던 삶의 모습과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이렇게 내 삶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까…… 뭐라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한밤에 뛰쳐나가는 것뿐이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러닝의 효과는 꽤 괜찮았다. 가볍게 살살 뛰다 보면 노폐물처럼 쌓인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조금씩 걷히는 느낌이었다. 심리상담보다 배로 효과가 있었다. 특히 밤 열두 시가 다 되어갈 즈음 하는 러닝은 왠지 모르게 설렜다. 당시 『재즈의 발자취』 단행본 시리즈 마감을 앞두고 야근이 잦았던 탓도 있었지만, 일부러 늦게 나간 것도 있었다. 자정 즈음은 궁 주변으로 관광객들이 붐비지 않는 시간대였다. 그 고요함은 내게 약간의 긴장감과 더불어 편안함을 안겨 주었다. 나는 자정에 진동 알람이 울리도록 맞춰두고 뛰곤 했다. 열두 시가 땡, 하면 뭔가로 변신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기대감을 품고.

어쨌거나 그날도 늦은 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뛰던 중이었다. 자정이 되기 10분 전이었다.

경복궁 둘레길의 중간 지점인 건춘문 현판이 보였을 무렵, 마침 듣고 있던 음악이 끝났다. 이어폰을 빼자 곧바로 쨍, 하는 매미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리는, 이 부드럽고도 슬픈 관악기 소리는 뭐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리자 건춘문을 배경으로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그 남성은 한여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남색 셔츠에 세미 정장 바지를 차려 입고 있었다. 번쩍이는 악기 하나를 소중히 받쳐 든 채로.

마일스였다.

고궁 담벼락을 배경 삼아, 달빛 아래 고독하게 홀로 서서 황색 트럼펫을 불고 있던 마일스는 그야말로 우아하고 근사했다. 그가 내는 건조하지만 섬세한, 그 깨질 듯 깨지지 않고 이어지는 음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조용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때마침 열두 시를 알리는 알람이 진동했다. 나는 진동을 끄고 카메라 앱을 연 뒤, 내 앞의 그 꿈같은 장면을 조용히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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