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미연 씨 스토커 아냐? 그 여자랑 사귄 적은 있대?”
상담 선생님이 내게 묻고 있었다. 상담을 관둔 지가 언젠데, 왜 이 여자가 내 앞에 있지. 게다가 갑자기 웬 반말이지…… 가만 보니 선생님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느새 P로 변해 있었다. 그를 붙잡고 싶어 손을 뻗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는 멀어져 갔다. 나는 그에게 달려가며 말했다.
“미연 씨는 마일스가 영국에서 반년 간 만났던 사람이야.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했던 사람이었는데, 재즈를 더 좋아했대. 특히 마일스 데이비스 팬이었지. 두 사람은 런던에서 안 가본 재즈 바가 없었어…… 내 연락을 받아줬다면 이런 이야긴 진작에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날 피한 거야? 어째서 내 모든 연락을 차단까지 했던 거야?”
P는 내 말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물었다.
“마일스 밀러가 마일스 데이비스 흉내를 낸다고 그녀가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어느새 그는 더욱 멀어져 저 멀리 점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단순히 흉내만 냈던 게 아니야. 매일 얼마나 진지하게 연습했는데. 그의 음악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했고…… 근데 넌 왜 자꾸 멀어지는 거야. 가지 마, 제발 돌아와!”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고 돌려 세웠다. 상담 선생님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길영 씨, 불안은 집착을 만들고, 집착의 대상은 때론 사랑하는 사람이 되죠. 그런데요,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집착이 아니거든요.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언젠가 P 씨가 길영 씨한테 웃으면서 말했다면서요. 나한테 그만 집착하라고. 그거 장난으로 한 이야기 같죠? 아니에요. 그게 그 사람 진심이었던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괜찮으신가요? 많이 피곤하셨나보네.”
택시 기사 목소리에 순간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기사는 내 잠꼬대에 놀랐는지 백미러로 뒷좌석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JFK 공항에서 무슨 정신으로 우버를 잡아 탔는지 기억이 안 났다. 택시에 올라 타자마자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정말이지 기분 나쁜 꿈이었다. 내내 잘 잊고 있던 P가 꿈에 나타나다니.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뉴욕에 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렜다. 그러고 보니 이런 감정도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조금 전 꿨던 꿈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정신 없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보이는 저 섬이 루즈벨트 아일랜드에요. 우리는 지금 이스트강 위 대교를 건너는 중이고요. 여기 뷰가 좀 멋지죠.”
백미러로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기사가 어색한 억양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아랍계 청년으로 보이는 그 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사진을 찍기 위해 창문을 잠깐 내렸다. 여름의 끝자락에 불어오는 뉴욕의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다. 마일스를 만나러 이 먼 곳까지 오게 될 줄이야…….
“제가 가는 숙소에서 버드랜드 가깝지요?”
내가 묻자 기사는 목적지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하더니 대답했다.
“숙소에서 차로 15분 정도면 브로드웨이 도착이니까 뭐, 가까운 편이죠. 버드랜드 가시려는 군요.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재즈 클럽이죠. 근데 거기 말고도 좋은 클럽이 많은데. 저 할렘에 민튼스 플레이하우스나 코튼 클럽, 뉴욕서 제일 오래된 빌리지 뱅가드 등등.”
기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순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친구가 버드랜드에서 공연을 해요.”
“무슨 악기요?”
“트럼페터에요. 마일스 밀러. 마일스 데이비스 뺨치는 실력이죠.”
“처음 듣는 이름인데요. 뭐, 나야 재즈 문외한이니까. 뭣보다도 난 밤늦게까지 택시를 모느라 그런 재즈 바에 앉아서 발 끝을 까딱이며 여유 부릴 시간이 없거든요.”
때마침 숙소 앞에 도착한 택시가 멈춰섰다. 급정거를 하느라 끼익 소리가 났다. 순간 어디선가 마일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G 마이너’.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다 왔어요.”
창밖으로 허름한 호텔 하나가 보였다. 나는 택시 문을 열면서 인사했다.
“고마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