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ack 09. 버드랜드

by 연지


그동안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그리고 마일스에겐 지난 8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평일 저녁이었음에도 브로드웨이 거리는 관광객과 현지인들로 붐볐다. 나는 뉴욕의 화려한 밤 거리를 즐기는 대신 구글 맵을 켜고 서둘러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부지런히 걷다 보니 어느덧 브로드웨이 44번가였다. 고개를 들자 검은 간판 위에 적힌 하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B I R D L A N D

드디어 이곳에 오다니. 언젠가 뉴욕에 가게 되면 버드랜드에 꼭 한번 찾아가보자고 마일스와 얘기하곤 했었는데…… 이곳으로 그의 공연을 보러 오게 될 줄이야.

입구에서 예약 내역을 보여주자 클럽 직원이 공연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안내했다. 계단 길 끝까지 내려가자 빨간 벽면 사이로 좁은 문이 활짝 열린 공간이 나왔다. 안쪽으로 관객들과 함께 푸른 불빛이 쏟아지는 무대가 보였다. 몇몇 연주자들은 벌써 무대 위에서 튜닝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무대 위 퀸텟 단원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드럼과 피아노, 색소폰, 베이스 연주자는 모두 올라와 있었지만 트럼페터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역시 마일스…… 그는 알고 있었을 거다. 마일스 데이비스도 종종 무대에 늦게 도착하거나 오자마자 곧바로 무대 위에 올라가 공연을 시작하곤 했다는 것을. 그나저나 저 무대 위에 정말 내 친구 마일스가 서는 것일까. 이곳에 서려면 보통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 텐데. 문득 궁금했다. 마일스는 뉴욕에 와서 음대를 다시 들어가기라도 했던 걸까, 아니면 다른 재즈 뮤지션들에게 인정을 받을 만큼 그새 실력이 엄청나게 향상되기라도 했던 걸까.

어쨌거나 내겐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첫 공연과 함께 이렇게 뉴욕에서의 성공적인 재기 공연까지 볼 수 있게 되었으니.




마일스의 첫 데뷔 공연은 서촌에 있던 작은 바에서 있었다. 8년 전, 마일스와 내가 못 만난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가 안 보이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불안해하고 있었다. 반년 간 적어도 2주에 한 번 이상은 만나왔던, 나의 둘도 없는 친구가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그것도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당시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회사에서 해고당한 지 벌써 몇 개월째였지만, 재취업은 쉽지 않았고 쓰고 있던 소설도 영 진척이 안 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 곁엔 이제 아무도 없었다. P도, 마일스도.

처음엔 일단 참고 기다렸다. 러닝을 나갈 때마다 늘 마일스를 봤던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연습실을 찾아가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어떤 날은 그를 찾아 온종일 동네를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그가 갈 만한 카페를 들어가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그를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마일스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그런 사람이 서촌에 살기라도 했냐는 듯 마일스는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추위를 피해 우연히 한 재즈 바에 들어갔던 날이었다. 언제 한번 가봐야지 생각만 하다 그날은 위스키라도 한 잔 마셔야 겠다는 생각에 즉흥적으로 들렀던 것이었다.

그곳은 버드랜드와 달리 작고 아담한 동네 바였다.

폭이 좁은 계단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계단 끝에 도착하자 은은한 주황빛 조명이 감도는 비좁은 홀이 나왔다. 정면에는 조그만 무대가 보였고, 그 맞은편엔 LP판들로 빼곡한 벽과 기다란 바 자리가 있었다. 바와 무대 사이엔 작은 테이블석도 몇 개 놓여 있었다.

나는 바 석에 자리를 잡은 뒤 위스키를 한 잔 주문했다. 바에 앉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테이블석 객석은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지만, 바 안의 손님은 나까지 포함해 모두 네 명 정도뿐 안 되는 듯했다.

무대 위엔 업라이트 피아노와 소박한 드럼 세트가 한 대씩 놓여 있었다. 주문한 위스키가 나왔을 무렵, 원형 테이블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던 세 사람이 무대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손님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오늘 공연할 연주자들이었던 모양이다.

재즈 바 스피커에서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던 음악이 꺼졌다. 곧이어 무대 조명이 확 밝아지더니, 별다른 소개도 없이 곧바로 연주가 시작됐다.

순간 나는 마시던 위스키를 뿜을 뻔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마일스가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깔끔한 세미 정장을 차려 입고, <’Round Midnight>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감미롭고도 서정적인 그의 트럼펫 선율이 바 구석구석에 차분히 스며들고 있었다.

마일스는 프로 연주자처럼 능숙하게 무대를 장악해 나갔다. 피아노와 드럼 멤버 들과도 합이 잘 맞아 보였다.

“봐, 내가 괜찮을 거라고 했지? 마일스 밀러라는 친군데, 앞으로 종종 불러야겠어.”

바 뒤쪽에서 사장과 직원이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대에 눈을 고정한 채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들었다. 알고 보니 그날 마일스의 공연은 즉흥적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공연이 예정돼 있던 트럼페터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그가 대신 서게 된 것이다. 사장은 직원에게 말했다. “매일 트럼펫을 들고 우리 바에 와서 앉아 있던 거 너도 봤지? 어제 너 오프였던 날 저 친구가 영업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기가 연습하고 있는 곡이라며 저 곡을 연주하더라니까.” 그러면서 그는 그때 마일스의 연주를 듣고 솔직히 놀랐다고 했다. “제법 듣기에 괜찮았거든.”

그날 무대 위 마일스의 연주는 제법 듣기에 괜찮은 정도를 넘어 그야말로 훌륭했다.

나는 바 뒤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것을 멈추고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마일스에게 단 일 초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도 내 시선을 느꼈던 걸까. 우리는 곧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나를 알아보곤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지긋이 웃어보였다.

마일스의 미소를 보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에 기뻤다.

이전 08화#Track 08. Straight, No Ch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