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08. Straight, No Chaser

by 연지

마일스와 만난 지 한 달쯤 되어갈 무렵, 나는 처음으로 그의 연습실에 놀러갔다.

경복궁역 근처 외진 골목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방음이 잘 되어 있는 8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벽면 한가득 그가 연습 중인 곡의 악보들과 함께 마일스 데이비스 사진들이 여럿 붙어 있었다.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마일스, 댄디한 옷차림에 트럼펫을 들고 카메라 렌즈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마일스, 앨범 《Tutu》 재킷 사진 속 눈을 감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인상을 쓰고 있는 마일스, 권투하는 마일스, 버드랜드에서 봉변을 당한 뒤 피가 철철 나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경찰서에 앉아 있는 마일스까지…….

사진들을 한 장씩 천천히 구경하다 벽 끝에 이르렀을 때였다. 깡마른 몸에 요란한 술이 달린 점퍼를 걸치고, 목에는 실크 소재의 새빨간 머플러를 두른 마일스 데이비스 사진이 보였다. 그의 음악이 재즈록과 크로스오버 재즈 쪽으로 넘어간 시기였다. 다리미로 태우기라도 한 듯 바짝 펌을 한 머리 스타일은 왠지 어색했지만, 그래도 부리부리한 눈과 굳게 다문 도톰한 입술에선 여전히 마일스 특유의 고집이 느껴졌다.

“마일스, 지금 마일스가 딱 이때 마일스 데이비스 나이대 아니에요? 그럼 이런 모습으로 다녀야지 지금은 너무 단정하잖아…….”

나는 사진을 가리키며 마일스에게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늘 마일스 데이비스의 젊은 시절 패션을 고수하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마일스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이더니 말했다.

“난 젊은 날의 마일스 음색이 제일 좋아. 그의 음악이 비밥에서 쿨재즈로 넘어가던 그 시기. 미연 씨가 좋아했던 《Kind of Blue》 앨범이 나왔던 게 딱 그때였지.”

또 그놈의 미연 씨…… 나는 그녀의 이름을 듣는 게 슬슬 지겨워지려 했다.

“여긴 방음 잘 되는 연습실이니까, 이제 입으로만 중얼거리지 말고 여기 트럼펫으로 진짜 연주 좀 해봐요.”

나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마일스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카펫 위에 놓아 두었던 트럼펫을 소중히 집어 들었다.

곧이어 그의 트럼펫에서 익숙한 곡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이번엔 〈’Round midnight〉이 아닌, 〈Straight, No Chaser〉였다.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예전에 재즈 단행본 작업을 하다 이 곡명을 발견했을 때 무슨 뜻인지 찾아봤던 적도 있었기에. ‘Straight’는 술에 물이나 얼음, 탄산수 등을 섞지 않고 그대로 마시는 걸 의미하며, ‘No Chaser’는 술을 마신 뒤 콜라나 물, 주스 같은 걸 곁들여 마시지 않는 걸 말했다. 그렇다면 ‘Straight, No Chaser’는 대략 ‘돌려 말하지 말고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달라’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었다.

나는 이 곡명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곡에 얽힌 마일스의 일화를 들은 뒤 마음이 바뀌었다.

“내가 미연 씨에게 고백하던 날, 같이 있던 재즈 바에서 〈Straight, No Chaser〉가 연주되고 있었어. 나는 그녀에게 말했지. 나와 평생을 함께해달라고. 이제부터 같이 살자고.”

미연 씨는 바로 그다음날부터 잠적했다고 했다.

아, 마일스…… 그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매 순간 음의 선택에 신중했던 것처럼 타이밍을 중요시했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상대의 마음을 봐 가면서 움직였어야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마일스에게 조언해줄 입장은 아니었다. 어쩌면 P에겐 내가 마일스 같은 존재일지도 몰랐으니까. 나는 마일스가 미연 씨에게 그랬던 것보다 P에게 늘 더 직진, 아니 돌진하곤 했으니까.

어쨌거나 나 같으면 속상해서라도 연주하지 않을 것 같건만, 마일스는 마일스 데이비스가 연주한 수많은 명곡들 중에서도 〈’Round Midnight〉과 함께 〈Straight, No Chaser〉만 죽어라 연습하고 있었다.

그래도 놀라웠던 건 그의 끈기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색소폰을 불었어서 그런가, 아니면 원래부터 관악기에 타고난 음악성이 있었기 때문인가, 어쨌든 그는 제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마일스 데이비스가 음을 내는 방식으로, 그의 옷차림으로, 그의 포즈로.

하지만 언젠가 나는 내 친구 마일스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니, 내가 너무 성급한 걸까. 지금은 시작일 뿐이라고 보면 될까. 생각해 보니 마일스 데이비스도 한때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의 연주에 푹 빠져선 그들의 즉흥 솔로 트럼펫 연주를 모조리 따라해 보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그때의 마일스 데이비스는 십 대였고, 그는 머지않아 곧 자기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찾아갔다.

마일스도 언젠가 자기만의 연주를 보여주길 바랐다. 더불어 미연 씨가 아닌 다른 더 좋은 사람을 만나길 바랐다.

사실 그 바람은 나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도 전작을 잊게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아가 더 이상 P에게 집착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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