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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rang Jan 09. 2022

무선 이어폰


출근길이었다. 버스에 올라 뒤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다. 하차벨이 울리고 내 앞 줄 옆에 앉은 고등학생쯤 보이는 학생이 다음 정거장에 내리려고 하차문 앞에 섰다.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끼고 있는 학생은 하차 태그를 하려고 주머니에서 교통카드를 찾고 있었다. 점퍼와 바지 주머니를 뒤졌지만 카드가 없는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바라봤다. 그때 동시에 내 앞에 앉아있던 남자분이 학생이 앉았던 자리에 떨어진 카드를 들고 학생에게 다가가 건넸다. 학생은 카드를 받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현했다. 훈훈한 장면이었지만 묘한 공백이 느껴졌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고, 고맙다는 인사를 나눴는데 둘 사이엔 어떠한 말도 오가지 않았다. 둘 사이에 오간 건 오직 교통카드와 눈 맞춤 한번뿐. 두 사람 사이의 공백은 너무 커 보였다.   

  

무선 이어폰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엉킨 줄을 풀지 않아도 됐고, 과한 동작을 해도 빠지지 않고, 쉽게 빼고 끼고를 반복할 수 있었다. 유선 이어폰보다 몇 단계 높은 편함에 사용시간도 훨씬 더 길어졌다.


착용시간이 길어진 만큼 주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됐고 청각적인 표현보다 시각적인 표현이 늘었다. 그래서일까 사라진 선처럼 오고 가는 대화도 끊어진듯하고 작은 오해들도 많이 생긴다.


누군가의 노래나 음성을   듣기 위해 해야  말을  하고 들어야  말을  듣게   아닌지. 어찌 보면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게 되니 진정  편한 세상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심금을 자극하는 노래라 한들 ‘저기요, 카드 떨어트렸어요’,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더 마음을 울리고 듣기 좋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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