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성 지능 장애
일호 씨는 사회적 기업에서 물류 업무를 하고 있다. 급여도 최저임금을 훌쩍 넘게 받는다. 가끔 회사에서 회식으로 귀가가 늦을 때도 있고 주말에는 회사 사람들과 약속이 잡아 놀러도 다닌다. 금전 관리도 스스로 잘한다. 한 달에 정해진 금액만 사용하며 고가의 물건을 구입할 일이 있을 때는 미리 이야기하여 지출 계획을 알려주기도 한다. 일호 씨의 장애명은 지적장애이고 등급은 3급이며 공동생활가정에서 거주하고 있다.
등급은 장애가 심한 정도를 나타내는 일종의 구분 방법이며 1급과 2급은 중증, 3급에서 6급은 경증으로 본다. 지체장애 등이 포함된 신체적 장애는 1급부터 6급으로 구분되지만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정신장애가 포함된 정신적 장애는 1급부터 3급까지 구분된다. 모든 장애가 1급부터 시작되는 건 아니다. 신체적 장애 중 언어장애는 중증이 없고 3급과 4급만 있고 신장 장애는 중간 단계 없이 2급과 5급만 있다. 이처럼 장애 유형과 장애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등급을 정하고 있다. 등급에 따라 정부 지원도 달라진다.
일호 씨와 공동생활에 함께 지내는 분들은 세명이다. 두 명은 지적장애 2급, 한 명은 자폐성 장애 2급이다. 일호 씨처럼 언뜻 보면 장애가 없어 보이지만 지적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경계성 장애라고 한다. 장애 정도가 매우 경하여 장애인인지 비장애인인지 구분인 안 간다는 일종의 현장 용어이다. 정확한 명칭은 경계성 지적 지능이며 흔히 경계성 지능 장애라고 한다. 경계성 지능 장애를 갖고 있는 분들은 이따금 양가감정이 보일 때가 있다. 장애인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감정과 장애인으로 보호받고 싶어 하는 감정.
우리는 함께 나들이나 여행을 다닌다. 지원자는 중증 발달장애 입주인 옆에서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다른 일행들은 우리를 따라오는 식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입주인 네 명과 지원자 한 명, 다섯 명이 무리 지어 다닐 때면 일호 씨는 꼭 멀찌감치 떨어져서 온다. 마치 우리의 일행이 아닌 것처럼. 처음에는 기다렸다가 함께 이동했지만 우리와 거리를 두고 가고 싶어 하는 걸 알아챈 후로는 기다리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거나 거리가 멀어지면 전화 통화로 서로의 상황을 묻곤 했다. 특별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함께 식당을 이용할 때라든가 시설물을 이용할 때면 얼굴을 숙이거나 다른 곳을 바라보며 함께 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혹시 자신도 중증 장애인처럼 보일까 봐,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사실은 큰 도움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사람인데, 복지카드를 내밀지 않으면 아무도 장애인으로 보지 않는데. 일호 씨는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은 남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불편해하니까. 그렇다고 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혜택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무료나 할인 제도는 최대한 이용하고 몰랐던 정보를 알려주면 관심을 보이며 나중에라도 꼭 활용해보겠다고 한다.
장애등급 제도는 2019년 7월에 폐지되었다. 장애별로 1급부터 6급을 나뉘던 장애는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 ‘심하지 않은 장애’로 두 단계로 구분되고 있다. 기존의 장애등급은 의학적 판단기준에 따른 획일한 서비스 제공으로 오히려 차별을 기준이 된다며 비판받아온 제도다. 장애등급 폐지로 공급자 중심의 지원체계에서 수요자 중심의 지원체계로 전환된 것이다. 등급이 아닌 장애 정도에 따라 장애 당사자에게 폭넓은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거주시설 입주인의 대부분은 중증 장애인 분들이다. 모든 지원은 중증 장애인 중심으로 계획되고 생활환경도 그렇게 조성된다. 하지만 장애 정도가 심한 분들만 입주해있는 건 아니다. 장애가 심하지 않은 분들도 있다. 발달장애인 중에는 경계성 지능장애에 속하는 분들도 계신다. 이런 분들이 중증 장애인을 위한 환경에서 살면 어떨까?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모든 걸 해준다면,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하지 못하게 한다면,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 한다면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무시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등급을 없애고 장애 당사자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데 거주시설은 아직도 지원자 중심의 지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장애등급 폐지는 장애 정도에 따라 차별 없이 필요한 지원을 하기 위함인데 등급이 사라졌다고 거주시설의 모든 장애인을 장애의 정도가 심한 장애인으로만 분류된다면 오랜 투쟁 끝에 얻은 등급 폐지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등급 폐지는 단순히 장애인의 권리증진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사회사업가는 이런 변화 속에서 또 다른 메시지를 찾아 읽어야 한다. 혜택은 확대하되 장애의 정도에 따라 지원하는 방법과 생각을 바꾸는 것. 이 숨은 속뜻을 일호 씨를 통해 알게 됐다. 경계성 지능장애는 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은 경증 장애에 속한다. 그동안은 지적장애 3급에 턱걸이하듯 걸쳐져 중증도 경증도 아닌 예매한 경계에 있었다. 이젠 장애 정도에 맞게 무심한 듯 도와주고, 슬그머니 물어보고, 봐도 못 본 체하며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면서 마음까지도 챙기는 지원을 해야겠다. 이렇게 해서 스스로 결정하고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 세상을 경계하던 마음도 조금은 사라지지 않을까. 이번 주말에 다 함께 단풍 구경을 갈 계획인데 일호 씨에게 같이 갈 건지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