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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rang Nov 16. 2022

애련한 기억

전원


준혁 군의 말과 행동이 거칠어졌다. 얼마 전까진 안 그랬는데 욕과 험한 말, 물건을 집어던지는 행동,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 행동을 자주 보였다. 사춘기라 이해하고 달래면 좀 나아지려나 싶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강도가 더 세졌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의자를 집어던질 때면 집안 분위기는 말이 아니다. 공동생활가정에 함께 거주 중인 세 명의 입주인은 각자 방으로 가서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이런 행동이 잦아지다 결국에는 물건을 던지는 행동을 막거나 소리 지르지 말라는 입주인과 지원자를 물거나 때리기까지 하게 되었다.   


한 달에 한번씩 다니던 소아 정신과 의사 선생님과도 상담을 했다. 약을  변경하거나 새로 처방받는 것 말고는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사는 입주인이 걱정되었다. 한 집에 사는 누군가가 거의 매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물건을 집어던진다면 집에 들어오기 싫을 것이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표정이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받았던 원장님은 준혁 군과 면담을 했고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결론을 내렸다. 이곳에 살기 싫다는 준혁 군의 의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함께 사는 입주인이 걱정이 컸기 때문이다.  


여느 사람은 사는 곳을 옮기는 것은 이사라고 하지만 시설에 사는 분들이 사는 곳을 옮기는 것은 전원이라고 한다. 보통 병원을 옮길 때 쓰는 말이지만 복지 현장에서는 시설에서 다른 시설로 갈 때 쓰는 말이다. 준혁 군이 전원 갈 시설을 알아보는 일도 나의 몫이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일반 거주시설로 가는 것보다는 지금과 환경이 비슷한 공동생활가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공동생활가정은 거주시설의 중 가장 적은 인원이 모여 살고 일반 가정과 동일한 환경에서 사는 가장 자립 생활에 가까운 거주시설의 형태이다. 또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특수학교 고등부 2학년에 재학 중이어서 전학이 가능한 곳이어야 했다. 공동생활가정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접속해 입주인을 모집하는 곳을 추렸다.      


준혁 군이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서울 내 공동생활가정을 비롯해 수도권의 일반 거주시설도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처음에는 서울권에 있는 시설들을 알아보다 수도권, 충청권, 그러다 전북권까지 알아보게 되었다. 수차례 면접도 보고, 체험 거주도 했지만 완전한 전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준혁 군의 전원이 어려웠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서울, 수도권 내의 시설엔 정원이 꽉 차 빈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점점 충청권, 전북권 등 남쪽 지역으로 내려간 것이다. 두 번째는 미성년자 신분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설이 성인 시설이어서 입주가 어려웠고 무연고자였던 준혁 군의 상황에서는 절차가 복잡했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따로 있었다. 바로 전원 사유다. 시설에 입주 문의를 하고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으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이어가다 보면 반드시 묻는 질문이 있다.

“근데 왜 전원을 하려는 건가요?”


이 질문을 받으면 숨이 막힌다. 준혁 군의 전원을 결정한 배경을 솔직히 이야기하기도 난감하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써 청소년 기니, 사춘기니, 동거했던 다른 입주인의 핑계를 대는 등 에둘러 말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입주가 어렵다는 이야기나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면접 약속이다. 겨우겨우 입주가 결정되면 다음 단계는 체험 입주다. 체험 입주란 시설마다 기간이 다르긴 하지만 일주일 또는 이주일 정도 입주해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최종 입주 결정을 하는 단계다. 준혁 군은 입주 거절부터 면접 탈락, 체험 거주 후 탈락 등 모든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전북에 위치한 시설에 입주하게 됐다. 입주가 어렵다고 아무 시설이나 보낼 순 없다. 우선 준혁 군이 살고 싶어 하는 곳이어야 하고 환경도 갖춰줘야 하고 운영도 안정적인 곳이어야 한다. 새로 입주한 곳에는 준혁 군 또래의 입주인이 많았고 학교도 다닐 수 있는 곳이었으며 무엇보다 원장님이 전원 사유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잘 적응하며 살도록 돕겠다며 준혁 씨 같은 모습을 보이는 분들도 잘 지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정원을 채우려는 다급함도 입주인을 행정의 대상으로 보는 무례함도 직원의 업무 강도를 걱정하는 비인격성도 없었다. 믿음이 갔다. 시설을 둘러보고 준혁 군도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렇게 준혁 군은 새로운 집에 입주하게 됐다.      


몇 차례에 걸친 준혁 군의 이사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엔 복잡한 감정들이 꿈틀거렸다. 준혁 군이 전원을 가게 된 이유가 나의 부족함 때문은 아닌지 더 나은 환경의 시설로 갔으면 했지만 그렇지 못한 미안함에 자책감이 먼저 튀어 올랐다. 더 이해하고 신경 썼더라면, 내가 더 전문적이었더라면 , 지역사회 자원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더라면 나아지지 않았을까.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그러다가 ‘아니야, 함께 사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계속 지내다가는 더 안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었을 거야. ’ 스스로 다독이기도 했다. 파도처럼 밀려오고 물러나는 감정의 끝에는 내가 그리해도 되는지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나의 판단이, 시설 종사자의 결정이 한 사람의 살 곳과 이사를 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시설의 존재 이유가 약자를 돌보기 위함인데 더 돌봄이 필요한 약자들은 오히려 살 곳을 잃거나, 더 먼 곳으로,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더 열악한 곳으로 밀려나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 판단의 주체가 시설과 종사자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과연 그럴 권리가 있는지에 대해서, 다수의 안정을 위한 일이었는지, 모두가 동의한 것인지에 대해서, 장애 정도가 심하면 더 이해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에 대해서, 복지시설의 목적에 부합한 결정인지에 대해서 수많은 질문이 오갔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준혁 군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두고두고 남을 애련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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