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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rang Jan 04. 2023

남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

54개월 19일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주아가 제일 좋아하는 누나, 제일 잘 놀아주던 누나가 떠났다. 아내에게는  조카, 나에게는 처제의 자녀다.  동서가 미국으로 발령 나면서 가족 모두 이사를 갔다. 제일 슬퍼할 사람은 당연히 주아여야 했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오히려슬픔은 어른들의 몫이었다.


처제네가 떠나기 전 날 장인 장모님과 처제네 가족, 아내와 주아가 모여 식사를 했다. 마지막 만찬인 셈이다. 식사 내내 코를 벌름 거리며 울음을 참는 장인어른과 요즘은 세상 좋아졌다며 매일 얼굴 볼 수 있을 거라며 끝까지 딸을 위로하는 장모님, 진짜 떠나는 걸 실감하며 차분해진 아내와 울다가도 금방 웃는 막내딸다운 처제의 거리낌 없는 표현이 뒤섞인 자리였다.


네 남매 중 둘째 딸인 아내와 셋째 딸인 처제는 결혼 후에도 친정 근처에서 살았다. 세 모녀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보는 사이다. 주말이 되면 친정으로 모여 놀다 가기 일쑤다. 이렇게 평생을 같이 살다시피 한 처제네가 저 멀리 떠난다니 믿기지 않았는데 그날이내일로 다가오니 묶어 둔 감정들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끝내 식사자리는 울음바다가 됐다.  식사를 마치고 주아와 택시를 기다리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아내도 참던 눈물이 터졌다. 누구보다 덤덤했던 아내가 눈물을 터트리자 처제도 따라 울고 함께 있던 아이들도 따라 울었다. 하지만 주아만은 울지 않았다. 멀뚱멀뚱 이 상황을 지켜볼 뿐.  택시 안에서도 이별의 여운은 한동안 머물렀다. 아내가 훌쩍이며 주아에게 뽀뽀하자 한마디 했다.


”엄마 아쉬워? “

아내는 뭐 그런 말을 하냐며 놀라더니 아쉽다 하고는 주아에게 물었다.

”주아는 누나랑 형아가 미국 가는데  안 슬퍼? 이젠 놀지도 못하고 못 보는데?”

주아는 대답했다.

“난 용감하니까 안 울어. 남자니까 안 울어 “


제일 슬퍼할 거라 생각했던 주아는 아무렇지 않았다. 헤어진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고 금방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고. 주아의 마음을 정확히 모르겠다. 결국 마지막까지 제일 덤덤했던 사람은 주아였다. 남자니까 안 운다라고 전해 들었을 땐 툭하면 남자는, 남자니까, 남자가 말이야 라며 참고 견디라고 했던 비논리적인 강요가  잘못된 성 역할을 각인시킨 건 아닌지 뜨끔했다. 물론 아직 그럴 리 없겠지만 무심코 뱉는 말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했다.


처제네는 떠났다. 한참은 심심하고 어색할 것 같다. 아내는 장인 장모님의 허전함을 달래려 더 자주 친정으로 갈 것 같다. 주아와 놀아주는 일은 내 몫이 될것이다. 커가는 주아의 요구사항은 날로 구체적이고집요하며 끈질길 것이다. 누나처럼 아기자기하고 잘맞춰주며 긴 시간을 놀아주진 못하겠지만 뭐 해볼 수 있는 만큼 해보련다. 누나의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보련다.


앞으로도 주아에겐 수많은 헤어짐과 섭섭함, 아쉬움이 쌓일 것이다. 그때마다 마음을 잘 추스르면 좋겠다. 그리고 그럴 때 옆에서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슬프면 울어도 된다고, 그것도 용기라고. 남자여서 하지 말아야 할 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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