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녁식사를 하러 한 식당을 찾았다. 입구에는 두 가족이 입장을 대기하고 있었고 한 팀은 기다리다 못해 돌아가던 참이었다. 무더위에 기다려야 하나 살짝 짜증이 났지만 맛은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신호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기다리던 중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그냥! 안 받을 랍니다! 결식아동 꿈나무카드
“애들아, 그냥 삼촌이 밥 한 끼 차려준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와서 밥 먹자.”
이런 내용 외에도 가게 들어와 눈치 보지 말라는 내용과 자신의 핸드폰 연락처를 적어놓고 미리 연락을 하면 식사 준비를 해놓겠다는 내용,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응원하는 글들이 적혀있었다. 결식아동을 위해 밥 한 끼 무료로 준다는 내용이었다. 무더위 속에도 따뜻함이 느껴졌다. 우리 주변 곳곳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들이 아직 많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위안을 삼았다. 그러면서 문득 꿈나무카드를 이용하는 청소년들이 식당을 찾아올까? 사장님의 바람대로 편하게 와서 밥 먹고 가는 아이들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식당은 일반 고깃집과 다르게 일식집처럼 bar 구조였으며 직원이 직접 손님 앞에서 고기를 구워주는 곳이었다. 식당의 구조 덕에 사장님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사장님, 앞에 간판 보니까 꿈나무카드 소지 아동들은 무료로 식사를 준다고 쓰여 있던데. 정말 멋지십니다. 대단하세요. 근데 애들은 좀 와서 먹나요?” 내가 물었다.
“저희랑 몇 가게가 함께 하고 있는데요. 오는 애들이 없어요. 가끔씩 오긴 하는데 잘 안 오더라고요”
사장님이 삼겹살을 뒤집으며 이야기했다. 사장님의 대답은 내 예상과 일치했다. 우리는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나가며 식사를 했다.
만약 내가 꿈나무 카드 이용자라면 사장님한테 편하게 전화해서 ‘밥 먹으러 갈게요’라든지 식사 후 계산 전에 ‘저 사실 꿈나무카드 갖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절대 못한다’다. 그것도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꿈나무카드는 도입 때부터 이용 아동들의 사생활 노출과 낙인감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었다. 좋은 취지의 제도이지만 이용의 어려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카드 디자인 변경과 가맹점 확대, 잔액 확인의 편리성 등을 개선하며 여러 문제들을 보완하고 있지만 착한 가게의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기엔 아직 2%가 부족해 보인다.
왜 그럴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때 도와주고 싶다는 내 마음보다는 받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를 더 헤아려야 한다. 주는 사람이야 필요하겠거니 하고 선뜻 베풀 수 있겠지만 받는 사람은 그 도움으로 상처가 될 수도 있고, 기회를 박탈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금이 갈 수도 있고, 짐이 될 수 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마음이 완성되려면 이렇게 많은 경우의 수를 고민해야 한다. 도움을 주는 일이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이 된다면 이 아픔은 누구한테 호소할 수 있을까? 남을 도와주는 것이 곧 배려가 아니라 마음까지 헤아리는 것이 진짜 도움이다. 그래서 선행에도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혹시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될까요?
혹시 어떤 물품이 필요한가요?
이런 물품이 있는데 필요하신 가요?
선행을 하기 위한 배려의 첫걸음은 질문이다. 정말 필요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 행위가 배려이고 선행의 시작인 것이다. 후원 담당자로서 업무 할 때도 후원을 해주겠다는 연락이 오면 우선 너무 감사하다. 거기에 먼저 무엇이 필요한지, 이런 물품이 있는데 필요하지 여부를 먼저 물어봐주면 통화 중에도 이미 마음이 풍요러워진다. 필요 여부도 묻지 않고 이런 물품이 있으니 보내주겠다거나, 어떤 물품이 올지도 모르고 후원을 받을 때면 아직 먼 동행의 길을 보며 공허해질 때도 있다.
배려 없이 단순히 주는 것에서 끝나는 건 동정이며 넌 도움이 필요하고 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서열을 정하는 것과 같다. 그냥 주면 감사하게 받으면 돼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도와주는데도 무슨 배려가 필요하나며 콧방귀를 뀔 수도 있겠지만 가난한 사람과 부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기부자와 수혜자 같은 이분법을 떠나 적어도 같은 사람이라는 시점에서 본다면 이런 요구는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