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라우프라우 Aug 14. 2023

FrauFrau's Frau.005 로자 파크스

FrauFrau's Frau-05

 여성의 삶과 자유를 응원하는 프라우프라우가 ‘여성의 자유’를 주제로 역사 속 인물을 조명해 보는 ‘FrauFrau’s Frau’의 다섯 번째 주인공은 현대 인권 운동의 어머니 '로자 파크스'입니다. 혹자에게는 생소할지 모를 로자 파크스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요?


 미국 의회가 '민권의 영부인', '자유 운동의 어머니'라고 칭송한 인물이자, 20세기 중요한 인물 100인 중 한 명이며,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받았고, 사후에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 국회의사당 내 원형 홀인 로툰다에 이틀간 안치된 여성이자 첫 번째 민간인이었던 로자 파크스. 인권 운동 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그녀의 삶을 통해 '여성의 자유' 실현에 대한 힌트를 얻어보고자 합니다.

 로자 파크스는 1913년 2월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와 함께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근처로 거처를 옮겼고, 이후 몽고메리에 있는 여자 산업 학교에 다닙니다. 훗날 앨라배마주 흑인 교원대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했으나 할머니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도중에 중퇴합니다.


 1932년 로자는 레이먼드 파크스와 결혼합니다. 당시 미국 남부 사회는 악명 높은 '짐크로우 법' 등에 의해 흑인들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해 있는 시대였습니다. 흑인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고, 투표권은 더욱이 얻기 어려웠습니다. 대중교통조차 흑인과 백인을 구분하여 탑승시켰습니다. 세상이 이러니 대부분의 흑인은 가난한 처지로 잡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로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을 꾸리던 그녀는 남편의 외조로 고등학교 교육을 마쳤고, 3번의 도전 끝에 가까스로 투표권을 등록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후 1943년 남편을 따라 흑인 인권운동 단체인 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에 가입하여 간사와 서기를 맡는 등 열정적으로 활동합니다. 그녀는 일찍이 억압과 차별에 맞서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던 주체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그녀가 민권운동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 사건이 촉발됩니다. 일명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이라 불리는 운동의 출발점이 된 이 사건은 당대의 시대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당일 로자는 일하던 백화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탑니다. 당시에는 백인과 흑인 전용 좌석이 나눠져있었고 로자는 자연스럽게 흑인 좌석에 앉습니다. 이후 버스에 백인 승객들이 점차 많이 타기 시작했고 버스는 금세 만원이 됐습니다. 백인들이 자리에 앉지 못할 정도가 되자 버스기사는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로자를 포함해 흑인 자리에 앉아있던 네 명의 흑인들에게 백인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라며 일어나라고 요구한 건데요. 세 명의 다른 흑인들은 움직였으나 놀랍게도 로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당시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버스기사가 다그치자 로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요.

 버스기사는 로자를 경찰에 신고했고 로자는 몽고메리 시 조례 6장 11절 '분리에 관한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지만 혐의 없음으로 그날 풀려납니다. 이 사건은 금세 흑인 사회에 알려지며 각지의 흑인 교회를 중심으로 더이상 버스를 타지 않겠다는 내용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으로 확대됩니다. 이 과정에서 로자는 14달러의 당시로서는 큰 벌금을 선고받게 되고 그녀는 이에 항소하며 인종차별 법에 정식으로 도전하게 됩니다.

 역사는 역사를 낳는 법이죠. 로자가 불을 지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확대되면서, 한 교회의 모임에서는 '몽고메리 진보 협회'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때 이 모임의 회장으로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한 젊은 목사가 선출되는데, 그가 바로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세계적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입니다.


 로자를 비롯해 많은 인권 운동가들의 피와 땀이 결실을 맺은 듯 버스 보이콧 운동은 연방 대법원이 버스 안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380여 일 만에 막을 내립니다. 이를 통해 더욱 자신감이 고취된 흑인들은 인권운동에 박차를 가했고 결국 1970년대 흑인과 백인 사이의 '법적' 차별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이렇듯 로자가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일이 여러 인과를 거쳐 흑인에 대한 법적 차별을 없애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인권운동이 진행되는 내내 신념과 인내심을 지켰고, 인권운동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모든 방면에서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그저 열의와 반발심만으로 결과를 낸 것이 아니라 사회 분위기와 백인들의 고집을 꺾기 위해 그 누구보다 똑똑하고 전략적으로 행동한 것이죠. 프라우프라우는 이러한 점에서 로자 파크스가 용기 있고 실천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의 가치를 진일보시킨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한된 능력과 노력으로 고군분투하여 최악의 억압에서 일말의 자유의 빛을 만들어 낸 그녀가 존경스러운 이유입니다.


 2005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로자 파크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던 그날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사람들은 그날 내가 피곤했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항상 말하지만 ... 내가 정말로 피곤함을 느꼈던 건 참고 굴복해야 하는 일 그 자체였다.


썸네일 Image 위키피디아


Subscribe @프라우프라우

Be Free Be Frau


프라우프라우 인스타그램 매거진 

프라우프라우 유튜브 매거진  

프라우프라우 쇼핑몰 바로가기 ◀

프라우프라우 카카오톡 채널 

작가의 이전글 BBC, "휴머노이드는 왜 다 여자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