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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 Nov 30. 2020

나는 여자고 내 키는 177cm이다

과거의 나와 화해하기

나는 여자고 내 키는 177cm이다. 한국에 살 때에는 누굴 만나든 키에 관한 질문을 꼭 받았었다. 심지어 나를 처음 봤을 때의 인사가 "와~키가 몇이세요?"인 경우도 많았다. 한창 예민하던 스무살 신입생 때는 한 선배에게 "키가 너무 커서 한국 남자는 절대 못 만날 것 같으니까 네덜란드에나 가서 살야야 되겠다"라는 덕담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내 인생에 너무 많았던 덕택에, 한국에서 찍었던 단체 사진을 보면 늘 짝다리를 짚거나 허리를 수그리고 있다. 나는 큰 키가 콤플렉스였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내가 나로서 받아들여지는 수용의 경험'이 없었던 것 같다. 키가 조금이라도 작아보이는 옷을 입고, 덩치가 커보일까봐 늘 다이어트에 집착했다. 한 번은 레몬디톡스 다이어트라며 일주일 내내 레몬물만 마신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은.


아마 한국을 나오고 싶어졌던 이유 중에 하나는 더이상 그 갑갑함을 견딜 수 없어서였던 것 같다.


독일에 오니 그 누구도 내 키를 묻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초면에 키를 물어보는 경우는 더더욱. 독일에서도 내 키는 큰 편이지만, 한국에서처럼 어딜 가든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다. 누구도 키를 궁금해하지 않고, 어디든 허리를 펴고 다닐 수 있다는 게 나에겐 해방이었다. 독일에 와서 스스로가 갑자기 '동양인'이라는 틀에 갇혀버린 것을 견디지 못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에게 그건 아무 문제조차 아니었다. 


우스운 점은, 여기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초면에 내 키를 물어본다는 사실이다. 2n년 동안 같은 질문에 단련이 된 나는 우리 부모님 키, 동생의 키를 줄줄 읊으며 나는 유전적으로 큰 것이고 우유같은 건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웃으며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만. 마음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독일에 온 첫 해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왜 우리나라, 우리나라사람 대신에 한국, 한국인이라는 단어를 쓰세요?

어떻게 대답했는지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 속으로 '초면에 이런 걸 묻는 당신같은 사람 때문에요'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질문을 받기 전에는 내가 '우리나라' 혹은 '우리나라사람'이라는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이제와서 생각을 해보니 한국과의 연결고리를 모두 끊고 싶어서 한국을 완전히 타자화 시키느라 '우리나라'라는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것 같다.


독일에서 알게 된 한국 친구들은 휴가로 한국을 간다. 한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는 알지 못 한다. 그리운 건 한국에 사는 내 가족과 친구들 뿐. 한국과 내가 살던 도시 서울을 떠올리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때의 싸르르한 마음이 먼저 든다. 태어나고 자란 나라인데도 왠지 내가 물에 둥둥 뜬 기름처럼 느껴지던 시간들 때문이겠지.

독일로 나온 이유 중에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싶었던 것도 있지만, 한국사회에 질려버렸던 탓이 더 크다. 어느 순간에 그냥 그 땅의 모든 것이 견딜 수 없게 싫어졌다. 거기에 있던 나의 모습까지도. 뽀얗게 화장을 한 채 분홍색 핸드백을 메고 원피스 치마를 입은 내 옛날 사진을 보는 게 편치 않다. 꼭 남의 옷을 빌려입은 사람처럼 어색해보인다.


한국에서 살 때의 좋았던 시간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구김 없었던 시간이 단 한 순간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국사회를 생각하면 갑갑하고 화가 난다. 그리고 아마 이건 과거의 나에게로 향하는 분노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나'로 살지 못했던 시간들이 아깝고 또 안타깝다. 지금 독일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살 수 있었다면 애초에 한국을 나올 필요도 없었을텐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이렇게 편안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살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그냥 막연한 바람이지만, 언젠가는 한국과 그리고 또 나의 지난 시간들과 화해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 그리고 나의 지난 날을 미워하는 건 아주 버거운 일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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