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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yn Apr 27. 2021

독일에서 직장인이 되려면

<나의 독일은 세모모양 - 2편>
3. 독일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해서 영어만으로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4. 독일 사회에선 나이가 중요치 않아 40살에도 신입사원으로 입사가 가능하다?


독일에서 사무직 노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시기가 있다. 사람은 적응과 망각의 동물이라 그 꿈을 넘치게 이루고 나니 금요일만 기다리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독일에 온 첫 해는 정말 괴로웠다. 어디에서 사느냐가 아니라 뭘 하면서 사느냐가 중요하다며 나의 독일행을 극구반대한 아빠의 말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다행히도 나의 불행을 독일에 사는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에 진절머리를 내며 귀국하기 전에 안정된 직장을 잡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아 일이 잘 풀렸지만, 독일어를 꾸준히 공부한 것도 취업에 도움이 되었다. 대부분의 한인들이 독일어를 모른 채 독일에 온다. 나도 독일어 자격증조차 없이, A2 수준으로 입국했다가 냉정한 현실을 깨닫고 TestDaF를 땄다. 


3. 독일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해서 영어만으로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히 No. 뒤에 느낌표를 백 개쯤 붙이고 싶을 정도로 강력히, NO. 


독일어를 못 하면 일상에서부터 주눅이 든다. 독일에 갓 도착했을 때엔 슈퍼마켓이랑 드럭스토어에 가는 것부터 도전이었다. 전부 모르는 단어이니 스킨인 줄 알고 클렌징 워터를 산 적도 있고, 요리용 크림 대신 요거트를 산 적도 있다. 크림 파스타를 만들겠다고 양파랑 마늘을 열심히 볶은 다음 그 위에 요거트를 부었을 때의 기분이란.


먹고 사는 것도 문제다. 독일어를 못 하면 취업문이 바늘구멍 수준으로 좁아진다. 선택지는 딱 두 개. 글로벌 기업, 아니면 한국 회사.


베를린에는 미국을 본사로 둔 글로벌 기업, 스타트업이 많이 들어와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니 내부 언어는 당연히 영어. 다만 이런 회사에 취업하려면 확실한 무기가 있어야 한다. 이력서에 서울대 졸업이 써있어도 여기서는 그 가치를 모른다. 영어도 독일어도 모국어가 아닌 한국인에게 눈을 잡아 끌만한 경력마저 없다면 면접 기회조차 받기 어렵다. 한국에서 취업이 어렵다지만 해외에서 외국인으로 취업하는 건 극강의 난이도다. 


그래서 많은 한인들이 한국 기업으로 눈을 돌린다. 한국 기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눈다. 대기업의 한국 지사, 혹은 영세 한인업체. 대기업 지사는 거의 독일회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현지인들이 많다. 주재원들이 독일어를 못 하니 회사에서는 영어를 쓰는 경우가 많지만 꽤 많은 포지션이 독일어를 요구한다. 거래선과 컨택하는 부서라면 원어민 수준의 독일어가 필요하다. 영어와 한국어만으로 충분한 자리더라도 취업은 쉽지 않다. 독일어를 못 하는 것 빼고는 완벽한 이력서를 가진 한인들이 곳곳에서 몰려들기 때문. 나는 독일에 와서 평생 볼 MBA 소지자를 다 만난 것 같다.


그러면 이제 영세 한인업체가 남는다. 대부분의 영세 한인업체는 한국에서라면 출근 첫날에 도망갈만한 근무조건을 내걸면서도 나갈테면 나가보라는 식으로 뻔뻔하다. 이런 곳에서 일을 하다보면 편안하고 여유로운 독일 생활을 즐기기는 커녕 여기가 독일인지 한국인지조차 헷갈리고 대체 무엇을 위해 가족, 친구 다 떠나와 이 고생을 하나 싶어서 크게 현타가 온다. 이 시점이 되면 선택지는 귀국 뿐이다. 


내가 독일에 온 지 첫 해에 가장 후회했던 건 안전망을 충분히 갖추지 않고 무작정 출국했던 점이다. 외국에 살다보면 낭떠러지를 마주할 일이 많다. 이 때 최대한 많은 자원을 갖고 있어야만 지치지 않고 버텨낼 수 있다. 든든한 통장잔고가 있다면 베스트지만 그게 어렵다면 독일어라도 완벽히 배우고 나와야 한다. 독일어로 일상 회화만 가능해도 훨~씬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회에 어느정도 속해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나라 말을 못 하면 아무리 사는 게 편안해도 계속 이방인이다.


4. 독일 사회에선 나이가 중요치 않아 40살에도 신입사원으로 입사가 가능하다?

늦은 나이에 주니어 레벨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건 어느 나라에서나 힘들다. 독일이라고 예외가 아닌데도, 한인 커뮤니티를 보면 독일에서 새로 도전하고 싶다는 글들이 꽤 자주 보인다. 아마 정년이 67세로 길고, 나이에 구애받지 않으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아서 이런 이미지가 생긴 것 같다. 내가 다니는 회사에만 해도 백발이 성성한 중/장년층이 많고 30년 이상 장기근속하는 직원들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는 외국인이다. 독일이 한국보다 기회가 열려있는 사회일 지는 모르겠으나 그게 언어가 안 되고 기술도 없는 외국인이 무조건 좋은 직장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본인이 독일에서 취업을 준비한다면 석사까지 있는 20대 중반 독일인보다 월등한 장점을 가져야만 한다. 막 석사를 마친 데다가 비자, 언어 문제가 없는 20대 중반 독일인과 비자 서포트가 필요한 30~40대 한국인이 같은 포지션에 지원했다면 나같아도 독일인을 면접에 부를 것 같다. 회사는 모험을 싫어한다.


독일 사회는 한국보다 나이가 덜 중요하고, 취업에 나이 제한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나이에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하는 사람을 자주 보지는 못 한다). 하지만 외국인 패널티는 생각보다 꽤 크기에 이를 상쇄할만한 경력이나 기술이 필수고 독일어는 기본이다. 


나는 독일행 비행기를 탈 때 이 나라의 시스템에 희망을 걸었다. 모두에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고 여유로운 근무환경이 보장된 복지국가. 이 문장은 독일에서 태어난 독일인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어도 설레는 마음으로 첫발을 디뎠을까? 아마도. 그 때는 지구 상의 어디엔가 파라다이스가 있다고 믿었던 코로나 이전의 시대니까.


삶의 희망은 나 스스로에게 있다. 눈 앞의 장애물을 뛰어넘어 다음 단계로 도약할 힘이 있는 사람은 어디에서 뭘 하며 살든 행복하다. 나의 경우에는 (운이 좋게도) 독일에 나와 예상치 못 한 문제들을 해결해가면서 내면의 힘이 생겼다. 독일 생활에 10000% 만족하고 인생에서 가장 생동감 넘치면서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이건 독일이 살기 좋은 나라라서가 아니라 내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독일에 나오지 않았다면 마음의 힘을 기르지 못 했을 거라는 아이러니.


사실 유창한 독일어나 화려한 이력서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도전을 마주하든 멋지게 풀어 나가겠다는 본인의 용기와 의지다. 이것만 있으면 스스로를 만족할만한 위치에 데려다놓을 수 있거나, 혹은 성취에 실패하더라도 스스로에게 진심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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