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연은 스스로를 벌주고 상처줘요. 역설적으로 그건 그가 상처받은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평생 오빠만 바라보는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해보고 투정도 부려봤지만 끝끝내 엄마는 오빠를 그리워하며 죽었어요. 상연은 사랑받을 수 없는 자신을 스스로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내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인 거니까요.
그래서 사랑받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요. 상연이에게 그건 진실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사랑을 받고 또 원하는 순간이 오면 짜증이 나요. 애정을 갈구하는 비참한 자신이 견디기 힘들구요. 상연의 심리적 진실에서 관심과 애정은 그렇게도 갈구하지만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었어요. 최초의 애착 대상인 엄마와의 관계가 그랬으니까요. 얻을 수 없는 걸 갈구하는 건 너무 비참하고 치욕스럽고 또 화가 나고 슬픈 일이에요. 그럴수록 너무 갖고 싶고 그만큼 또 비참해지구요.
아줌마와 상학에게, 그리고 자신의 엄마와 오빠에게, 당연하다는 듯 사랑받는 은중은 상연에게 선망과 시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어요. 너무도 부럽고 또 너무도 파괴하고 싶은 그런 존재요. 은중의 때뭍지 않은 온기는 나를 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참한 나의 진실을, 그 진실을 버텨내는 나의 안간힘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해요. 그건 너무나도 모욕적인 일이구요. 그래서 은중은 상연에게 한없이 고맙고 기대고 싶은 대상이지만 또한 동시에 파괴해버리고 싶은 대상이에요. 그런 혼란한 존재와 함께한다는 건 너무 큰 고통이에요.
상연은 자신의 심리적 진실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어요. 상연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속에 밀어 넣고 그 안에서 더 비참해 지는 거였어요. 언젠가는 이것이 끝나기를 바라면서요. 은중과의 관계는 그 비참함을 가장 강렬하게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구요.
상연은 은중과 상학을 통해 얻을 수 없는 사랑의 삼각관계라는 엄마, 오빠, 자신의 삼각관계를 반복해요. 그 안에서 사랑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질투하고, 또 비참해지고, 자신을 처벌해요. 언젠가는 이 지옥을 벗어나기를 바라면서요. 하지만 그 관계를 반복하려면 역설적으로 상대는 절대 사랑을 주지 않는 위치에 늘 머물러야해요. 그래서 상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상대가 그렇게 되도록 유도해요. 그럴만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선택하기도 하구요. 상연에게 은중은 엄마이자 오빠였고 되고 싶은 자기 자신이었어요.
은중은 솔직하고 선한 사람이에요. 그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는 온기와 불합리의 균열을 느끼는 정의로운 성품을 가졌어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은중은 사람들의 그늘을 보지 못해요. 누구나 가진 시기심과 자기 파괴적 욕구는 은중 자신에겐 수용될 수 없는 것들이었고 의식의 밖에 머물러 있어요. 은중은 상학을 통해 엄습하는 자기 안의 그늘을 견디기 어려워 이별을 선택했어요.
그늘이 드러나는 순간 그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겠죠. 사실은 자신이 아빠 없고 가난한 그리고 재능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스스로의 비참함이 견디기 어려운 걸 거에요. 은중에게 상연은 어쩌면 너무도 그리운 아빠였을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을 완전하게 해 주는 상징적 대상으로서의 아빠요. 나에게 완전한 돌봄과 안전을 주고 그럼으로써 나를 완전해게 하는 대상이요. 아빠가 안계시는 상실감과 슬픔이 은중에게는 열등감과 비참함으로 저장되었었나봐요.
초등시절 선생님과의 만남은 은중에게 구원이자 속박이었어요. 아빠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울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은 스스로 완전해 질 수 있다는 희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은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고, 또한 완전하지 못한 존재는 보잘것 없이 비참한 존재라는 그늘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은중은 자신 안의 질투심, 욕망, 분노, 비겁함 같은 것들을 절대 들여다봐선 안돼요. 아빠의 빈 자리를 좋은 것들로 채우고 그래서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니까요.
은중은 상연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한 적이 있을까요? 그렇다기엔 다만 동경의 대상으로서 망가져가는 모습, 자신의 이상화 대상을 깨는 모습에 분노가 너무 커보이죠. 자신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 선생님의 딸 상연은 좋은 아파트에 살고, 예쁘고, 춤도 잘추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에요. 상연은 은중이 되고자 하는 이상적 자기 대상이었어요. 이상적 대상은 나를 위해 절대 무너져서는 안되는 존재에요. 그런 존재가 무너지는 건 자신이 바라는 완전함이 깨지는 것이에요. 아빠로 인한 마음 안의 빈자리가 영원히 채워질 수 없다는 심리적 진실을 직면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은중은 상연을 온전히 품을 수 없었어요.
은중과 상연은 서로를 원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렸어요. 상대방의 앞에 놓인 길을 부러워하면서요. 상연은 죽음으로서 결국 너무도 부러운 은중에게 끝없이 자신을 파괴하고야 마는 자신의 존재 방식을 인정받았어요. 은중은 완벽하기만 해 보였던 친구의 바닥없는 그늘을 인정하며 스스로의 그늘을 돌아보게 되었어요. 은중과 상연은 그 순간 행복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