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의 뇌과학적 치료효과

심리상담 사용설명서

by 프로디언슬립

상담이 끝나면 내담자들은 흔히 시원하다는 소감을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시원해졌는지를 물어보면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하실 때가 많아요. 사실 상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말하지 못하는 고통과 말할 수 있을 때의 시원함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죠. 이 분야에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우화가 대표적이에요. 우화 속 주인공은 말할 수 없어 고통스러웠던 비밀을 결국 대나무 숲에 외친 후에야 편안해 질 수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말하는 것만으로 후련하고 시원해지는 걸까요? 여기에는 뇌과학적인 원리가 담겨있습니다.



어렸을 때 친구들 앞에서 망신당했던 순간, 갑작스러운 이별, 교통사고의 충격 등등. 이런 경험들이 제대로 말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뇌는 놀랍게도 이런 경험들을 '현재진행형'으로 저장합니다.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이라는 생각하는 뇌가 아닌, 생존 반응에 민감한 편도체(amygdala)가 강하게 활성화되고, 시간·맥락을 부여하는 해마(hippocampus)와 전전두엽의 통합 기능이 약화되어 기억이 감정 위주로 저장되는 거죠.


그래서 지하철에서 우연히 들은 비슷한 목소리, 봄날의 특정한 냄새,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는 갑자기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소환해버립니다. 뇌는 마치 "이 위험은 지금 일어나고 있어!"라고 오해하는 거에요. 우리가 밤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거나, 특정 장소만 가면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이유 없이 누군가를 경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기억이 과거가 되지 못하고 현재로 남아있기 때문이죠. 언어화 되지 못한 기억은 우리 안에서 경험 그 자체로 저장되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당시의 신체적,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 거죠.


이 정도만 설명해도 말하고 나면 안정되고 편안해지는 이유를 아시겠죠? 우리는 고통스러운 경험일수록 더 잘, 더 많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쉽지 않은 일이에요. 먼저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고, 어떤 부분에서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도 때로는 쉽지 않죠. 게다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내 이야기를 섣불리 판단하거나 충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을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하고요. 이런 조건들이 실제 삶에서 모두 갖춰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담자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심리상담을 경험해 보신 분들이라면 상담이라는 것이 TV에서 본 것처럼 분석과 솔루션, 교육이 아니라 끝없는 질문으로 이어져 당황해 보신 경험이 있을 거에요. 상담자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질문들은 내담자를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이에요. 고통이 클수록 내담자는 빠른 평가와 분석을 바랄 수 있어요. 하지만 몇 마디 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내는 건 전문가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에요. 오히려 숙련된 전문가일수록 충분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자신의 판단을 가능한 미루는 태도를 가지려 해요. 이것은 내담자를 쉽게 평가하지 않겠다는 존중의 의미를 담습니다. 그래서 질문은 그 자체로 치료적 효과를 가질 수 있어요. 존중과 관심을 담은 상담자의 질문들을 통해 내담자는 대체로 안정되는 기분을 느끼고,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또 그것을 말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스러운 경험을 인지적으로 재처리 하게 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 "그 느낌이 몸의 어디에서 시작되나요?", "지금 그 기억을 떠올리면 무슨 단어가 떠오르나요?" 이런 질문들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꺼져있던 전전두엽의 스위치를 다시 켜는 작업입니다. 감정과 감각으로만 존재하던 기억 조각들을 언어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죠. 내담자가 "그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꼈어요"라고 말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편도체 위주로만 저장되어 있던 기억이 시간과 맥락 속에 재배치되기 시작하는 거죠.


기억이 언어로 표현될 때, 전전두엽이 활성화되면서 “아, 이건 지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이구나”라는 새로운 인식 틀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마치 어지럽게 흩어진 책들을 적절한 책장에 정리하는 것과 같아요. 상담실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질문을 통해 기억을 불러올 때, 그 기억은 새로운 맥락과 함께 다시 써질 수 있습니다. 우리 뇌는 끊임없이 세상을 예측하는 기관이라서 "사람들은 항상 나를 버린다", "나는 위험한 상황에서 무력하다"와 같은 예측을 만들어냅니다. 상담자의 질문은 이런 자동적 예측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줘요. "정말 모든 사람이 당신을 버렸나요?", "그 상황에서도 당신이 할 수 있었던 작은 일은 없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뇌에게 "잠깐, 내 예측이 틀렸을 수도 있어"라는 신호를 보내고, 이는 새로운 신경 경로를 만드는 시작점이 됩니다.


정신분석에서 프로이트의 반복강박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처리 되지 않은 경험을 해결하기 위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고통을 반복해서 겪는 우리들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신경과학이 이런 발견들을 하기 이전, 정신분석이 발전하면서 프로이트의 개념은 처리 되지 않은 경험에 대한 자아의 무의식적 대처인 방어기제와 그런 경험을 주었던 대상과의 관계방식이 무의식적으로 패턴화되어 현재의 관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대상관계 이론으로 확장되었어요. 이런 이론들은 크게 직면-통찰-교정적 정서경험이라는 일반 원칙이 되어 심리치료 전반에 적용되어 왔다고 볼 수 있죠.



어떤 내담자들은 "말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라고 합니다. 네, 맞아요. 그저 말한다고 해서 상처가 마법처럼 사라지지는 않죠.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그 상처는 영원히 현재형으로 남아 우리를 괴롭힐 거에요. '말하기'는 치유 그 자체가 아니라 치유의 첫 단추입니다. 상담실은 단순히 감정을 토해내는 곳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뇌가 감당할 수 있게 씹고 소화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상담자는 질문으로 그 소화를 돕고, 내담자는 말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합니다. 그렇게 정리된 기억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습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던 고통에서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요. 우리는 거기서부터 다시 걸음을 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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