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가 있다. 남들은 행복하고, 희망에 차 있고, 어디론가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 혼자 가만히 서 있는. 영화 속에서라면 등장하자마자 이미 죽어 있는 주인공의 아버지의 아버지 정도 되겠다. 딱히 열심히 산 건 아니지만 잘나고는 싶다. 딱히 앞장서고 싶은 건 아니지만 뒤처지기는 싫다. 스스로도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아, 엉망진창이다.
한 차례 태풍이 쓸려 지나가고 나면 망가져버린 무엇인가가 보인다. 나 자신이다. 사람들은 기막히게 균열을 알아챈다. 누군가는 서열에서 물러나기를 자처한다. 틈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렇다. 조그만 바람에도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음껏 상처 준 이가 가만히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흡족해한다. 가만히 있는 것은 이미 마음속이 충분히 시끄럽기 때문이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이리저리 흔들려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서이다. 밖에서는 단단한 외피밖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상처는 흔적으로 남는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결국 '말을 하지 않아서 너를 괴롭게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차라리 미안하다고 하였으면. 누구든지 껍질이 깨어지는 때가 온다. 이미 나는 먼 바깥으로 걸어나가 버렸다. 아직도 당신은 깨어진 껍질에 대고 소리치고 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