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지 일주일째, 출근길이 사라진 아침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일어나서 아이들 등교 준비를 해서 보내고, 빈 집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 뭐 하지?'
그 동안 '해야 할 일' 리스트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텅 비어있었다. 프로젝트 마감일도, 회의 스케줄도, 상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이 공간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과 온전히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바쁨'이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을 외면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나온 뒤 집에 돌아와 보니, 엉망인 집은 나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책상 위에는 읽가 만 책들이 쌓여있었고, 서랍 안에는 언제가 쓰겠다며 모아둔 문구들로 가득했다. 옷장에는 체형이 바뀌어 더 이상 맞지 않는 옷들이 여전히 걸려있었다. 무엇보다 두 아이들 살림살이와 함께 뒤섞여 있어 내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찾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언제가는', '나중에', '혹시나'라는 전체로 보관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지난 몇 년간 살아온 방식과 같았다. 회사도 그랬다. 쓸모없는 스트레스를 껴안고 살았고, 이미 끝난 일에 대한 후회를 곱씹었으며, 남들의 평가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기보디, 남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고 애썼다.
퇴사 후 제일 먼저 몸을 움직인 것은 '정리'였다. 옷부터 시작해서 책장 5개를 모두 비워냈다. '이 옷을 언제 마지막으로 입었지?' 하나하나 살펴보며 정리했다. 2년 전? 3년 전? 어떤 것들은 처음 산 날짜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버리지 못했던 것들은 과감히 박스에 담았다.
책도 마찬가지였다.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하며 쌓아둔 자기계발서들, 트렌드를 따라 산 책들. 자주 보지도 않으며 불필요하게 쌓아둔 책들이 많이 있었다. 정말 필요해서 산 책보다 '성장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물건을 버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도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것도 필요없구나', '이것도 사실 강박이었구나.' 하나씩 깨닫게 되면서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정리를 마치고 훨씬 넓어진 방에 앉아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공간이 넓어진 것만큼 마음도 여유로워졌달까? 그제서야 궁금해졌다. 나는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 걸끼? 누구의 기대도, 평가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회사 다닐 때는 이런 질물을 할 여유가 없었다. 아니, 여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속였던 것 같다. 바쁘면 이런 불편한 질문들을 하지 않아도 되니가.
비워낸 공간에 내 취향이 녹아든 책장과 책상을 새로 구입해서 채워넣었다. 오래간만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취향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이 공간을 내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는 그런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책상의 색감, 디자인, 공간의 배치까지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라서 채워나갔다.
완성된 온전한 나만의 공간에서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단순한 질문과 일상, 생각들이었지만 처음에는 무엇을 적어내야 할지 쉽게 써지지 않았다. 그동안 내 감정보다는 해야 할 일을, 내 욕구보다는 성과를 우선시하며 살아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지난 나의 삶에 대한 회고의 시간을 갖었다. 회사 생활을 한 시간 동안 내가 배운 것들, 힘들었던 순간들, 성장한 지점들을 차근차근 적어보았다. 처음에는 아픈 기억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실패했던 프로젝트, 상사와의 갈등, 번아웃이 왔던 시간들. 그런 시간들을 글로 써내려가다 보니 그 안에서도 의미 있는 순간들이 보였다. 동료들과 함께 성취감을 느겼던 프로젝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며 단단해진 마음,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좋았던 기억도 힘들었던 기억도 모두 나의 일부였다.그것을 부정하거나 미화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정리하는 것. 그것이 진짜 비워내기의 시작이었다.
회고를 마친고 나니 신기하게도 앞으로의 계획이 더 명확해졌다. 이전에는 빨리 다음 직장을 구해야 되고 뒤쳐지면 안된다는 조급함으로 가득했다면, 이제는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들이 자리 잡았다.
비워낸 자리에 정말 소중한 것들이 들어설 수 있다는 걸 체감했다. 남들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으로 남들의 속도가 아닌 내 속도로 살아갈 용기가 조금씩 생겨났다.
퇴사를 앞두고 있거나 이미 퇴사한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급하게 다음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물건도 생각도 감정도. 그동안 끌어안고 살았단 무거운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 그 과정이 처음에는 불안할 수 있다. 뭔가를 계속 쌓아야만 안전하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의 모양, 추구하고 싶은 가치, 소중히 하고 싶은 관계들이 비워낸 만큼 명확해진다.
퇴사는 끝이 아니라 정말로 나다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인 것 같다. 그 시작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용기 있는 비워내기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