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의 관심은 모든 존재의 상처였다.
몇 년 전 예술의 전당에서 자코메티 전시가 있어 서울까지 달려갔다. 캔버스에 그림만 보던 내가 조각에 관심을 보인 건 자코메티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걸어가는 사람'의 조각 작품 앞에서는 한참 동안 앉아서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미술사 스터디에서 내가 자코메티에 관한 자료 조사를 하게 되어 그를 공부해 왔다. 특히, 영화 '파이널 포트레이트'를 보면서 그의 작업 방법도 알게 되었고 인생 스토리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촬영한 자코메티를 그는 '비가 내리는 파리 거리에서 마치 번데기에서 깨어나는 유충처럼, 그가 걸어온다'라고 표현하였다. 그 사진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르트르와의 우정 덕분에 스위스 태생의 자코메티는 실존주의와 가장 긴밀한 관련이 있는 조각가이며 화가이다. 9살에 드로잉을 시작한 그는 14살에 첫 조각 작품을 만든다. 아버지 조반니는 유명한 후기 인상주의 화가였고, 18살에 제네바에서 공부를 했던 자코메티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 그곳에서 고대 건축물을 스케치하고 공부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나치에게 점령당하자 제네바로 돌아가 자신의 모델들의 기억을 떠올려 작은 인물상들을 제작했는데 1938년부터 1944년 사이 작품의 길이는 최대 7cm에 불과했다.
근육과 살을 제거하고 최소한의 형태만 남긴 철사 조각 같은 작품은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과 불안감을 나타내고 있다. 겉으로는 풍요로워 보이지만 속은 사막같이 황량한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하기도 한다. 자코메티는 앙리 마티스의 아들이자 뉴욕 은행가의 대표적인 화상이었던 피에르 마티스의 적극적인 후원 덕에 프랑스보다 뉴욕에서 더 많이 알려지고 유명해져 인생의 전성기를 맞았지만,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간 뒤에도 싸구려 호텔 방에서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갔고 평생 가난한 예술가의 길을 고집하였다.
“나는 살아있는 존재들이 부서지기 쉽다는 걸 알고 있다 서있기 위해서는 매 순간 많은 힘이 필요하다 우리는 매 순간 넘어질 위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인간은 멋진 그림이나 조각을 위한 핑곗거리가 아니다”
실존주의 예술은 존재를 묘사한다 "화가란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미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다. “ 자코메티를 실존주의를 빼놓곤 설명할 수가 없다. 실존주의 인간 관찰에서 진실에 가까운 솔직한 조각품을 만들었다.
카메라 기술이 발전하고 더 이상 보이는 그대로의 예술이 의미를 잃자 보이는 것 이상의 그 너머 무언가를 추구하고 한 자코메티.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무작정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든 것을 잃었을 때 포기하지 말고 걸어야 한다”라고 말한 자코메티는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의 ‘방향, 시선, 눈빛’에 집중했고, 그것이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유일한 것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