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맞벌이 부부의 숙명인 어린이집 하원 이후의 학원 돌리기. 어쩌면, 아이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원에서였을까. 어린이집에서 돌봄으로 퇴근시간까지 맡기는 것보단, 뭐라도 하나 배우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아내와의 의견이 일치된 후, 태권도를 보내기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집 바로 앞 태권도장으로 향한 우리는 바로 등록을 했다. 작년 5월 말. 첫째 여니는 어디에 풀어놔도 금방 어울리는 성격 탓에 바로 등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줬으나, 둘째 라미는 싫단다. 얼굴 표정에서도 싫은 티가 팍팍 나왔다.
‘음..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그렇게 여니는 태권도를 시작하게 되었고, 라미에게 왜 싫은지 물어보았다.
“다리 찢는 게 싫어…”
“다리 심하게 안 찢어~ 도장에서도 할 수 있는 만큼만 시켜주실거야~”
“그래도 싫어..”
내성적인 라미의 성격을 알기에 더 이상 권유하지는 않았다. 누나와 처음 떨어지게 되는 시기였다. 16시 반이 되면 여니는 태권도 등원 차량을 타고 도장으로 떠났고, 라미는 그대로 어린이집에서 하원하기까지 보냈다.
반년이 지나고 올해 초, 다시 한번 물어봤고, 바쁜 업무로 인해 일주일 정도 체험으로 도장을 보냈는데 웬걸. 다니겠다고 한다. 사실, 퇴근 이후에 라미를 픽업하고, 여니를 픽업하는 시간을 맞춘다는 것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퇴근 시간이 고정되어 있긴 하지만, 직장인들의 고충. 어디 칼 같은 퇴근을 할 수 있으랴. 크지 않은 스트레스를 겪고 있던 터라, 태권도장을 등록해 준다는 라미의 말이 너무나도 고마웠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결실을 맺는 시기다.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여니도 1품 심사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약 한 달 동안 승품 심사를 준비하기 위한 18시부터 한 시간의 보충수업. 저녁 식사를 두 번 차려야 하는 수고로움은 있었지만, 도전과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기회가 여니에게 주어졌으니 기쁜 마음으로 한 달을 보냈다.
‘4장부터 8장까지 품새를 다 배울 수 있을까?’, ‘나도 배울 때 많이 헷갈렸는데 잘할 수 있을까?’
틈틈이 유튜브의 품새 영상을 보여주며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세뇌 교육을 시켰다. 승품 심사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에 한 번에 승품하길 원하는 아빠의 마음이랄까. 초등학교 1학년이 하면 얼마나 할 수 있나. 유튜브의 영상은 절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따라 하던 여니의 모습은 영락없는 초등학교 1학년의 모습이었다. 엉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절도 있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곧잘 따라 하는 모습을 보고 희망을 찾았다.
한창 늦잠을 자도 모자랄 토요일 새벽 시간. 이른 기상을 위해 전날 저녁부터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알려주어서 그런지 깨우자마자 한 번에 일어났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내도 일찍 일어나 김밥을 말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한다. 사실, 온라인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지만, 오늘만큼은 가족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아침을 잘 먹지 않는 여니지만, 아내는 뭐라도 맛있게 먹이기 위해 김밥을 만다. 그런 마음을 여니는 모르는지 먹지 않는다. 아침부터 전쟁이다. 그럼에도 간식 통어 김밥을 넣어주고, 차 타고 이동할 때 꼭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는 엄마. 나는 안다. 손도 안 댈 것이라는걸.
부지런히 준비하고 집을 나선다. “잘할 수 있지? 그동안 노력 많이 했으니까 잘할 수 있어!”
“네! 잘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다 세 번 외치고 하면 잘할 거야!”
“네!”
“엄마 아빠랑 라미랑 같이 응원하러 갈까?”
“아니!, 엄마 아빠 있으면 부끄러워서 못할 것 같아.”
음… 사실, 가기로 다 준비했기에 간다는 말은 차마 하지 않았다. 도장에 도착하고 잘 하고 오라는 인사와 함께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승품 심사 장소로 이동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행사 순서에 따라 시간 맞춰 오시면 된다고 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늦지 않게 도착했다. 마침, 1품 심사가 시작되었기에 체육관 관람석 위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른 부모님들도 많이 오셔서 심사 장소는 많은 인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도장 아이들도 한 쪽에 자리를 잡고 품새 연습을 하고 있다.
관장님과 만나 인사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심사를 앞두고 대기하고 있던 여니와 눈이 마주쳤다. 숨어 있으려 했으나, 관장님을 찾던 여니의 눈길에 바로 옆에 내가 있었고, 바로 앞에 엄마와 라미가 있었으니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뿔싸. 괜히 보여서 긴장하거나 실력 발휘를 못하면 어쩌나…’ 걱정됐다.
드디어 시작.
기본 동작인 막기와 발차기. 그리고 이어진 태극 6장과 8장의 품새. 바로 휴대폰의 카메라 앱을 작동시켜 떨리지 않게 펜스에 기대고 흔들림 없는 안전한 촬영을 시작했다. 작은 화면은 기록용. 나의 눈은 여니의 품새 동작에 고정되어 있었다. 흔들림 없는 편안한 품새. 긴장은 나만 했나 보다. 나름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마무리 한 여니. 기특하다.
건너편 매트로 이동해 겨루기 시합. 아내와 라미와 같이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응원해 주기 위해 건너편 관중석으로 옮겼다. 파란색 보호대를 착용하고 또래의 상대방인 남자아이와의 겨루기 시작. 통통 튀는 발걸음이 가볍다. 국가대표 선수들처럼 스텝을 밟는 모습이 귀엽다. 1분 동안 진행된 그들만의 겨루기 리그. 왼발이 편한지 왼발로 발차기를 연신 하는 탓에 상대방은 힘을 못쓰는 모양이다. 여자아이를 배려하는 남자아이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명언이 여기서 나오는 듯하다. 여니의 쉼 없는 왼 발차기에 상대방은 어쩔 줄 모르는 듯하다. 도장에서 정말 잘 가르쳐 주신 듯한 모양이다.
‘땡’ 하고 종이 울리며, 승품 심사가 종료됐다.
도장 과장님과 사범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돌아오는 길.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멋졌어! 아주 잘했어!”
결과는 2주나 3주 뒤에 발표된다고 하니. 그동안 고생한 여니에게 선물 하나 주려고 한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까 여니 하고 싶은 거 하자!, 하고 싶은 거 뭐야?”
“점핑고(키즈카페) 갈래요!”
…………
얼라는 얼라다.